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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ca Apr 18. 2022

하마터면 놓칠 뻔한 눈동자

신나는 글쓰기 12기 1일 차-픽션 & 논픽션

미션 : 우리는 모두, 아니 몇 사람뿐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우리는 영화 <행복을 찾아서>의 크리스 가드너처럼 최악의 상황을 직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여러분도 아래 사진과 같은 상황에 직면한다면 아니, 저처럼 수중에 단 돈 8천 원만 남았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서연은 네 살 아이의 작은 손가락을 자신의 손에 꼭 쥐고서 아무런 표정도 없이 터덜터덜 걸었다. 누군가 그녀를 유심히 보았다면 신발이 무쇠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할는지도 몰랐다. 거의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하며 걷는 그녀는 위태롭게 보였다.


다니던 회사가 사정이 어려워지자 서연의 남편은 선배의 조언으로 사업을 한다고 사표를 썼다. 하지만 선배의 호언장담과 다르게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았다. 고정적으로 하던 일도 규모가 작았고, 간간이 들어오는 일도 있었는데 회사에 다닐 때보다 수입은 반 이상 줄었다. 처음엔 회사를 그만두면서 약속했던 생활비를 주려고 어떻게든 노력했지만 이내 그마저 힘들어졌다. 서연은 가지고 있던 돈을 야금야금 꺼내서 썼고 돈이 바닥나는 속도는 아이들이 커가는 속도를 따라잡았다. 그녀가 더 견디기 힘든 건, 무기력하게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남편을 보는 일이었다. 무슨 일이든 나가서 일을 찾고 다녀야 할 텐데 저렇게 집안에서 시간을 보낸 들 일이 생길 턱이 없었다.


서연이 일을 할까도 무척이나 망설였지만 시아버님은 암 수술하시고 회복 중이셔서 어머님이 도움을 주실 수도 없었고 친정 부모님은 지방에 멀리 계셨기 때문에 네 살 여덟 살 두 아이들을 돌봐줄 곳이 없었다. 큰아이만 있을 때에는 한 달에 백만 원을 드리고 믿을만한 분 집에 맡겨두고 일을 했었다. 들째를 낳고 그마저 힘들어졌고 누구에게도 부탁을 드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남편이 집에 있다고 해서 맡기고 일을 나서면, 일이 생겨도 그 남자가 바로 일을 할 수 없으니 선뜻 어떤 결정을 내리기 힘든 시기였다.


마침내 카드 결제일인 15일이 다가왔다. 그녀의 생활비 통장엔 8000원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카드 결제액은 158만 원이었다. 돈이 부족해도 한 번도 남편에게 채근해 본 적이 없는 서연은 아무 말 없이 큰아이 저금통장을 들고 둘째를 데리고 나왔다. 부족한 돈 얘기를 한들 저 남자는 얼마나 마음이 답답하고 힘들겠는가 싶었고 세상 누구보다 본인이 힘들 터였다. 어떻게든 손대고 싶지 않아서 건드리지 않고 있던 큰아이의 뽀로로 예금통장과 적금통장 두 개에는 500만 원 정도의 돈이 들어있었다. 아이가 그동안 받은 세뱃돈과 서연이 틈틈이 돈을 모으고 있던 통장이었다.


귀여운 뽀로로와 에디가 웃고 있는 통장이 든 그녀의 에코백을 아이의 손을 잡지 않은 손으로 꼭 움켜쥔 서연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심정은 부족한 157만 2천 원이 아니라 한 나라의 부채만큼 무겁고 비참했다. 잘 모아서 아이 대학 등록금도 하고 유럽여행 경비로 쓰라고 턱 하니 내놓고 싶었는데 겨우 500만 원도 채우지 못하고 이렇게 허물어야 하다니 자신의 인생이 내동댕이쳐진 기분이었다.


2층 계단을 어렵게 올라가 평소보다 무겁게 느껴지는 은행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가족 증명서까지 있어야 내어주는 아이의 통장을 허물고 그녀의 통장으로 이체시킨 뒤 칭얼대는 막내의 손을 다시 잡고 내려오는 그녀의 눈엔 눈물이 점점 차오르기 시작했다.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입안에서 옅은 피 맛이 느껴졌다.


배고프다는 아이에게 빵을 사주려고 지하철 입구 앞에 새로 생긴 빵집에서 소보로 빵을 두 개 사들고 다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그녀는 무심히 스마트폰을 바라보며 또 지긋이 이를 악물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짧고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렸다.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본 그녀 눈앞에 잠시 손을 놓은 막내의 작은 등이 보였다.


찰나였지만 그 순간 세상의 모든 시간이 100배는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아이의 몸이 밑의 에스컬레이터 계단과 거의 수평이 됨을 보는 동시에 서연은 아이의 옷을 꽉 움켜쥐었다. 바로 서너 계단 밑에 있던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긴 머리 여자가 아이가 넘어지는 것을 보고 소리를 질렀던 거였다. 그 모든 것이 1초 정도의 시간 동안 일어났다. 서연의 손에 잡힌 네 살짜리 아이는 무사했지만 그 긴 머리 여자의 눈초리는 매섭고 사납게 서연을 질책했다. 스마트폰을 보느라 아이를 돌보지 않는 무책임한 엄마로 보였을 것이다.


서연은 다시 아이의 손을 꽉 잡고 마치 도둑질이라도 들킨 사람처럼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벗어났다. 갑자기 그 긴 머리 여자 말고도 주변의 50대 무뚝뚝해 보이는 인상의 아저씨도, 짧은 교복 치마를 입은 10대 여학생도 자신을 힐난하는 듯이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아이가 다칠 뻔했다는 섬뜩함에 심장은 몸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방망이질 쳤다. 그녀가 집에서 나오면서 그때까지 온통 회색빛으로 가득했던 세상은 이상하게도 맑게 개었고, 지나치게 맑아서 선명함이 자신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도망치듯 한참을 걷다가 그녀의 목덜미가 축축이 젖었음을 알아차리고 잠시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아이의 눈을 바라봤다. 유난히 말없이 엄마 손을 놓지 않고 따라오던 아이는 맑고 큰 눈동자에 세상의 모든 따뜻함을 담고 축축한 서연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안겼다. 아이를 말없이 안고 있던 서연의 눈에서 끝없이 눈물이 차올랐다 떨어졌다.


"미안해.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우리 진이 손 놓치고 다른 생각해서 미안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 너희들이 있다면 무엇이라도 괜찮아. 그리고 고마워 진아. 엄마가 세상 속으로 돌아오게 해 줘서... 너희들이 엄마 세상이야. 언제까지라도 잊지 않을게."

서연은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서 꼭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축 처져있는 남편에게 그동안 혹여 마음 상할까 하지 못했던 말을 털어놨다. 돈을 벌어오지 않아도 좋다고. 돈이 되지 않는 일이라도 당신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는지 찾고 누구든 무료로 도와주는 일이라도 시도해 보면 좋겠다고, 당신의 능력이 아깝다고 설득했다.


바로 다음날 그녀의 남편은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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