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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ca May 08. 2022

모든 날이 모인 오늘

일기가 글이 된 날


오늘은 모든 날의 집합체 같은 느낌적 느낌이다.

가족모임 약속이 있는 어버이날, 목탁소리가 온종일 나는 석가탄신일, 한복을 입고 다니시는 분들이 유난히 많은 교회 행사일 등등


우리 집 베란다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길 건너에 절이 있다.

통상적으로 절이라 함은 산속 깊숙한 곳을 굽이굽이 힘겹게 올라가다 보면 고즈넉하고 조금은 조심스럽게 또는 위엄 있게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이곳은 마치 50미터 간격으로 즐비해 있는 교회처럼 삶의 터전에 자리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몇십 년 전엔 배밭이었고 우리 거실 풍경이 산이니 그 산 밑 자락에 있을만한 곳이었는지 모르지만 역시 교회보다는 낯선 느낌이다.


그 절도 조금씩 공간을 넓히고 해마다 공사도 여기저기 하면서 건물 하나를 지었다 허물기도 하고, 결국 그 자리에 큰 불상을 들여놓으셨다. 생각보다 신도도 많은 절이라는 것은 이런 행사가 있는 날 알 수 있다.

우리 집은 7층이라서 절이 거실에서 바로 보이지는 않지만 문을 열어놓고 자는 한여름엔 새벽의 목탁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소리는 4시 40분쯤 일정한 시간에 들리기 때문에 아침마다 지저귀는 새소리보다 더 이른 시간을 짐작할 수 있다.


특별한 오늘은 석가탄신일이다. 아침부터 계속 불경을 읽으시는 (외우시는) 스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시누이 식구들과 어머님과 점심 예약을 해두어서 외출했다가 커피까지 마시고 집에 돌아왔는데 아침과 같은 목소리가 들린다. 빨래를 개던 남편은 왜 계속 같은 소리를 반복하시냐며 의심스럽다고 한다. 나는 식사는 하셨나 걱정 아닌 걱정을 해본다. 물론 시끄럽고 부산스럽지만 이런 하루는 얼마든지 참을만하다. 오히려 바로 맞은편의 오래된 교회가 다른 교회로 인수되면서 신자들의 저마다의 방성 기도 소리가 열린 창으로 나오는 소음은 기괴하고 놀라웠다. 그 소리는 베란다를 통해 들리는 건 아니고 아파트 복도로 나가면 들려오는데, 처음 그 교회가 예배를 드릴 때 하나하나의 목소리가 한 덩어리가 되어 묵직하게 움직이는 느낌이 들어서 놀란 기억이 있다.


사실 나는 하느님과 나만 인정하는 크리스천이다. 그래서 우리 엄마가 집에 왔을 때 절이 앞에 있는 게 불편하지 않냐 고 물었다. 그렇지는 않았다. 절보다는 성당이 있었다면 훨씬 좋았겠지만 절이 있다고 불편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나뭇잎들이 초록으로 뒤덮여가던 5월에 이사할 집을 보러 다니다가 이 집을 들어서서 베란다로 보이는 초록 나무들에 반했었다. 그래서 절이 바로 아래 있다는 것이 큰 흠이 되지 않았다. 초록과 하늘이 보이는 대가라면 이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아주 가끔은 더 좋을 때도 있다. 석가탄신일 한 달 전쯤에는 절과 동네 도로변에 등을 달아놓는데 신비로운 아름다움이 있었다. 거실에서 절의 등불을 바라보고 있으면 신카이 마코토의 애니메이션의 한정면 같다.


그 등은 석가탄신일 당일 저녁에 신도들이 모두 모여 동네를 걷고 나서 등을 모두 철거한다. 물론 팬데믹으로 작년과 재작년 행사는 없었고 등만 달았다 떼어냈지만 오늘 유난히 시끄럽다고 느낀 건 몇 년 만에 집합 금지가 풀려서 제대로 된 행사를 하기 때문이었다.


회색은 나쁘다.

오랜 서울 생활을 하면서 내내 마음속에 있던 나만의 외침이었다. 바로 이전 집의 베란다로 앞 동의 회색 아파트가 보이는 게 정말 싫었다. 창으로 보이는 것들에 회색이 있으면 언제나 마음이 불편했다. 집이든 회사 사무실이든 그랬다. 하늘이 보이고 나무가 보였으면 좋겠다고 많은 이사를 하면서 늘 생각했다.

물론 결혼 전 동생들과 1층 아파트에 살 때 베란다로 나무가 듬뿍 보였지만 꾸물꾸물 송충이가 우리 집 담을 타고 베란다를 지나 방까지 습격해서 괴성을 지르고 호들갑을 떨었던 적이 있다. 그리고 며칠 밤을 꿈속에서 송충이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물론 그 송충이는 그저 자신의 길을 갔을 뿐이었겠지만 말이다. 그때 그 송충이를 누가 잡았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친구가 잡아줬나? 남동생이 잡았나?

그 후로도 1층은 계속되는 벌레들과의 싸움이었다.


아무튼 유난히 회색 알레르기를 갖고 있었는데 이 집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초록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다른 동에 비해 가격이 비싸서 남편이 도대체 뷰가 뭐가 중요하냐며 다른 곳을 보자고 했지만 내가 우겨서 이곳으로 오게 됐다. 요즘도 아침이면 운동을 다녀온 남편이 커피를 들고 베란다 앞 의자에 앉아 초록 풍경을 보고 있으면, 이 초록은 내 것이니 보지 말라고 한다. 일 년에 몇 번이나 보겠냐고 중요하지 않다던 사람이 매일 초록을 즐기면 안 된다고 핀잔을 주면 그는 역시 뷰는 중요했다고 잘못을 시인한다.


이렇게 글을 쓰는 동안 스님의 목소리와 목탁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다시 새소리가 들린다.

한없이 작은 공간이고, 천정부지의 서울 아파트 가격 중 가장 싼 곳이지만 새소리가 들리는 이 공간이 참 감사하다. 새소리와 초록색과 하늘의 여백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이지 절실히 느낀다.


아마도 나의 삶에서 필요한 것이리라.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것들은 아니겠지만 이런 글을 쓰면서 알아차리고 있다. 상실감과 상대적 박탈감에 허덕이던 저 구석의 찌그러진 영혼이 점점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제모습을 갖춰가고 있음을...


모든 날의 집합체인 오늘도 흐릿한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들과 함께, 많은 행사를 마무리하며 늦은 오후로 달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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