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표현방식은 칭찬과 인정, 봉사와 헌신,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 선물, 스킨십이 있다고 한다. 화요일마다 수업하는 정기적인 독서모임에서 질문을 받고 꽤나 골똘히 생각했는데 내가 원하는 방식은 칭찬과 인정으로 쓰고, 남편이 원하는 방식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으로 적었다. 물론 진지하게 그에게 아직 묻지 않고도 이렇게 적은 건 내가 부족한 부분인 걸 알고 있어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서로가 아쉽게 생각하는 것에 대한 차이다. 생각을 더 얘기해야 알겠지만 일단 얼마전에 외로움을 내비친 그에게 시간을 더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줌 모임 일정이 없는 금요일 오전이었다. 마침 만나기로 했던 친구들과의 약속이 깨졌고, 그날은 남편이 집에서 일하며 여유롭게 시간을 쓸 수 있었다. 적극 추천받았던 작품이 개봉 중이라서 둘이 영화를 보자고 남편에게 제안했다. 아무런 확답을 하지 않고 산으로 아침 운동을 갔던 그가 들어오자마자 물었다.
"영화 뭐 볼 건데?"
"글쎄, 보고 싶었던 영화가 있는데 워낙 호볼호가 갈리는 영화라고 해서 망설이고 있어. 당신이 보고 싶었던 거 있어?"
그의 의중을 파악하느라 표정을 세심히 살피며 물었다.
"남이섬에 갈까?"
뜬금없는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곧 떠올랐다. 며칠 전 남편이 "외롭다!"고 말했던 써니 언니 부부와의 그 술자리에서 남이섬에 가고 싶다고, 지금 가면 가을이 참 아름다울 거라고 했었다.
그와 시간을 함께하려고 마음먹고 있었지만 내겐 여유가 별로 없었다. 순간적으로 남이섬까지 다녀오려면 얼마나 시간이 소요될지 계산했다. 다음날까지 읽어야 할 <월든>이 아직 400여 페이지나 남아있었다. 하지만 난 그의 허전함을 채우는 방향으로 힘껏 노를 젓고 있었으므로 더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그래, 가자!"
가볍게 대답하고 준비를 서둘렀다.
우린 네비에 남이섬 제1 주차장을 설정하고 달렸다. 경춘로에 들어서니 단풍으로 물든 산과 맑은 가을 하늘이 아쉬운 가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유모차를 끌고 함께 간 이후로는 그와 남이섬이 처음이었다. 금요일이었는데도 사람들이 많아서 매표소에 줄이 백 미터는 길게 늘어서 있었다. 표를 끊는데는 시간이 걸렸지만 다행히 배는 바로 탈 수가 있었다. 가을이 아쉬운 사람은 우리만은 아니었다.
남이섬엔 가을이 가득했다. 사람이 지나치게 많아서 소로우가 걸었을 것 같은 조용한 월든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맑은 햇빛은 나무 사이사이로 눈부셨고 화사한 단풍나무를 사진으로 담으며 걸었다. 함께 걷고 또 걷는 우리는 밀착되어 거리를 느낄 수 없었다. 작고 귀여운 단풍잎 하나를 집어 들었더니 남편은 책 속에 끼워 넣으라고 했다. <월든>책을 꺼내서 남편에게 들어달라고 부탁하고, 빨간 잎을 올려놓았다. 우린 햇볕도 단풍잎에 얹도록 자리를 조금씩 옮기며 신중을 기했다. 그렇게 사진으로 가을풍경을 담으며 오래 걷다가 달큼한 호떡도 벤치에 앉아 먹었다. 떠들썩한 섬을 빠져나오는 배에서는 2층 빈자리에 앉았다. 살짝 피로감이 느껴질 때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가 운전을 하며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동안 월든을 꺼내 읽었다.
사람들은 진리가 멀리 어딘가에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진리가 우주의 외곽 어디에, 가장 멀리 있는 별 너머에, 아담의 이전에, 혹은 최후의 인간 다음에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영원 속에는 진실하고 고귀한 무엇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시간과 장소와 사건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느님 자신도 현재의 순간에 지고의 위치에 있으며 과거와 미래를 포함하여 그 어느 시대도 지금보다 더 거룩하지는 않은 것이다.
<월든> p.148~149
오늘은 생각을 미루지 않고 '지금'을 함께하며 남편의 마음을 토닥였다. 그리고 소로우의 말처럼 모든 시간과 장소와 사건은 어디도 아닌 '지금 여기에 있는 것'임을 잊지 않기 위해 글로 남기고 있다. 물론 그와의 갈등이 사라진 건 아니다. 그의 외로움이 싹 걷힌 것도 아니다. 하지만 떨어지는 가을을 잠깐 붙잡으며 외롭게 중년의 시간을 걸어가는 남편과 시간을 함께 하면서 서로의 마음을 위로했다.
마지막으로 들른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는 마른 나뭇잎이 툭 떨어져 있었다.
"아직도 많이 외로워?"
무심하게 물었다.
"왜?"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낸다는 듯이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그의 핸드폰이 울리고 잠시 통화를 하는 사이 하얗고 작은 잔에 담긴 진한 카푸치노를 모두 마셨다. 부드러운 거품이 만족스러웠다. 통화를 마친 그가 다 마셨으면 일어서자고 했다. 돌아가서 해야 할 급한 일이 많다면서 벌써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섰다. 그때 테이블 위의 낙엽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겨우 20분을 머물렀던 카페였지만 내 마음엔 맛있는 카푸치노만큼 만족감이 차올랐다. 이 가을은 어느새 사라지고 차가운 계절이 올 것이다. 머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