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는 이 어두운 두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을 하는 동안 우리는 일종의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낯선 곳에서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먹을 것과 잘 곳을 확보하고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 오직 현재만이 중요하고 의미를 가지게 된다.
- 여행의 이유. (김영하)
Q. 여행을 좋아하나요? 혹은 싫어하나요? 그 이유를 한 가지 적어주세요.
A. 좋아합니다. 갈 곳을 검색하며 미리 떠나는 시간도, 분주하게 짐을 싸는 시간도, 낯선 곳에 도착해 그곳만의 향기가 콧속으로 들어오는 시간도 즐깁니다. 비로소 자유를 느끼죠. 그렇네요. 저에게 여행은 자유를 의미합니다. 자유란 뭘까요. 자유는 태어난 순간에 주어지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살아있는 동안 진정한 자유를 느껴본 적이 몇 번이나 있었나 싶어요, 뭔가 답답한 껍데기 안에 웅크리고 살아가는 느낌을 받을 때가 훨씬 많았습니다. 이 초록별 지구가, 작고 소란스러운 나라가, 따뜻한 의무가 똘똘 뭉쳐진 가족이라는 이름이, 심지어 작은 키에 발만 큰 저의 육신 안에 제가 있다는 사실이 때로 견디기 힘들 정도로 갑갑합니다.
누군가는 저를 보고 배부른 소릴 한다고 하겠죠? 훨씬 더 힘들고 지치지만 열심히 성실하게 미래를 향해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차치하더라도 저는 그렇게 만족할 줄 모르고 늘 탐욕과 강박에 시달리며 작은 달팽이처럼 두텁고 딱딱한 세계 안에서 오들오들 겁을 먹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시간도 피부에 소름이 오돌토돌 올라옵니다. 그 답답하고 막막한 세계가 갑갑해서요.
이 세계가 작게 느껴진다면 더 큰 세계로 가려는 노력을 왜 하지 않을까요? 겁이 납니다. 여길 벗어나 어딘가로 뚝 떨어졌을 때 얼마나 막막할까요.
그런데 그렇게 잠시라도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여행입니다. 막막한 어느 곳에 뚝 떨어진 나를 바라보는 경험, 그것이 여행이죠. 좀 더 낯선 곳이면 좋고요. 외국이라면 더욱 좋겠죠. 그곳에 던져진 저는 역시 오들오들 떨고 있지만 꾹 감은 눈을 슬며시 뜨고 사방을 둘러보며 쏟아지는 햇빛조차 달라졌음을 바라봅니다. 한 발짝 한 발짝 낯선 거리를 걸으며 점점 저의 껍데기를 허물처럼 벗어던지고 마치 처음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것처럼 두렵지만 호기심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낯선 도시의 한복판에서 도시를 가로지르는 커다란 강 위의 다리 위에서 바람 냄새를 맡으며 비로소 삶의 가치와 의미를 되찾죠. 넒고 넓은 초록 들판위에서 두 팔을 흔들며 빙글빙글 돌면서 쏟아지는 자유를 만끽합니다. 그렇게 삶을 끝없이, 마치 끝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야 할 이유를 조금씩 회복합니다.
왜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이 세계에서 찾지 못할까요?
글쎄요. 회의적인 성향 때문인지, 구질구질한 현실 때문인지, 한참 부족한 소양 탓인지 그 모든 때문인지는 모르겠어요. 낯선 곳이 싫고 익숙한 집이 너무나 좋다는 사람이 부럽기도 합니다. 그는 거의 모두 행복하고 안정감을 느낄 테니까요. 그렇다 해도 저라는 사람은 아주 가끔 그렇게 자유를 느끼고 살아갑니다. 대부분을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다가 가끔 삶의 의미를 찾는다고나 할까요. 가끔이라도 얼마나 다행이냐고 또 다독입니다. 그래야 그때까지 버티고 살아갈 테니까요. 그때, 삶의 끝까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