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 혁과의 데이트 코스 1순위는 어쩌다 보니 마트가 차지했다. 집에서 요리를 자주 해 먹느라 그런 탓도 있지만, 마트 나들이의 장점은 생각보다 많았다. 집콕을 벗어나 콧바람을 좀 쏘일 명분이 되기도 하고, 제철 채소들의 진열 변화에 계절의 흐름을 실감하기도 하고(애처로워라...), 새로운 식재료에 대해서도 알음알음 배우는 것이 생기기 때문이다. 아, 단골 마트의 저녁 시간대 음악 선곡이 끝내주는 것도 한몫할 것이다.
여느 때처럼 신나게 마트 안을 배회하고 있는데 혁이 모처럼 심각한 표정을 짓고 서있다. 계란 코너 앞이었다. 얼마 전 그와 난각 번호에 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계란 포장지를 유심히 살피는 것을 보니 그 얘기가 신경 쓰였나 보다.
계란 껍데기 위에 표시된 난각 번호는 쉽게 말하면 계란의 주민등록번호라고 할 수 있다. 산란일자, 농장 정보, 사육환경에 관한 정보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동물 복지의 관점에서 난각 번호의 맨 마지막 숫자를 유심히 살펴보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닭이 어떤 환경에서 알을 낳았는지가 닭에게도 계란에게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육환경 번호는 1부터 4까지 나뉘어 있는데, 1에 가까울수록 닭이 살기 적합한 환경이라 볼 수 있다.
그림이나 숫자로 봐서는 '뭐 얼마나 큰 차이 있겠어?' 싶어 지기도 하지만, 양계장(양돈 농장, 개농장에서도 머물렀다.)에서 직접 노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한승태 작가의 에세이 『고기로 태어나서 』(2018)에 따르면, 우리나라 산란계 농장 대부분(3번 또는 4번의 배터리 케이지)의 체감은 이렇다.
'케이지는 가로 세로 50cm, 높이 30cm의 보통 가정에서 사용하는 전자레인지만 한 크기였다. 이 안에 닭 네 마리가(세 마리인 경우도 있었다) 들어가 있었다.'
'케이지는 날개를 접은 닭 세 마리가 들어가면 꽉 찼다. 케이지의 오른쪽 끝부터 왼쪽 끝까지 닭으로 빈틈없이 들어찼다는 뜻이다.'
'그나마 세 마리가 들어가 있는 건 운이 좋은 경우였다. 네 마리씩 수용된 케이지가 대다수였다. 이 때는 제일 약한 놈이 나머지 닭들 밑에 카펫처럼 깔렸다.'
이렇게 비좁은 환경에서 물리적 고통과 정신적 압박을 받은 닭들은 스트레스로 털이 빠져 괴기스러운 형상이 되거나 서로 쪼아서 상처가 가득하다고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본래 닭은 1년에 30개 정도의 알을 낳지만 산란계 농장에서는 인위적인 환경과 호르몬 조성을 통해 1년에 300여 개를 낳도록 만들어진다고 한다.
"산란계 닭들이 비정상적으로 끊임없이 알을 낳잖아. 체내에 칼슘이 몽땅 빠져나가니까 사람 손이 닿기만 해도 뼈가 투두둑 부서지더래."
그 책을 읽던 시기, 충격적인 대목을 읽고 혁에게 이런 내용을 전한 적도 있었다. 가을날 낙엽처럼 차곡차곡 쌓여간 이야기들이 계란 코너 앞에 선 혁의 발걸음을 어느덧 무겁게 했나 보다.
그러나 생각하는 바를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일단 '동물복지'라고 표시되어 있는 계란과 그렇지 않은 계란의 가격 차이부터 어마어마했다. 일반 계란이 30개 한 판에 5000원 내외라면, 동물복지란은 10개에 7000원 안팎에 달했다. 얼마 전 떨이로 판매되던 냉이 한 다발을 500원에 득템해서 나물로 무치고 된장국을 끓여먹으며 기뻐했던 우리다. 얼마나 저렴하게 샀느냐가 마트 쇼핑의 성공 척도였던 왕소금들에게는 멈칫할 수밖에 없는 난관이다.
동물복지 계란이라고 해도 무조건 사육환경이 '1'에 해당하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전에 구매했던 동물복지란의 사육환경은 '2'였고, 동물복지와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3'이 쓰여있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난각 번호를 제대로 알려면 계란 껍데기에 적힌 숫자를 직접 확인해야 하는데, 막무가내로 뜯어보지 않는 이상 당최 소비자 입장에서는 구매 전에 육안으로 계란껍질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괜히 포장지 위의 일련번호를 난각 번호와 헷갈려하며 한참 시간을 허비했건만 검색해보니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대체 왜 이런 시스템이란 말인가?)
그래도 대충채식주의자로서 어느 정도 내공이 쌓인 나의 경우, 한번 더 참고 계란 구매를 미루거나 정 힘들면(나도 아직 계란을 완전히 끊지는 못했다.) 난각 번호를 확인 못하더라도 동물복지란을 택하겠지만(지불하고 기대에 못 미치는 경우 어디에라도 항의할 심산...), 이제 막 이런저런 생활 습관을 바꿔보려 애쓰는 혁에게 다짜고짜 '우리 이제 계란도 끊자'거나 '무조건 동물복지란을 사야 한다'는 식으로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사육환경이 적어도 '4'는 아니었으면 했고, 동물복지란이라고 비싸게 구매했는데 혹여나 '3'인 것도 싫다고 했다. 고심 끝에 '1등급'이라는 표시가 큼지막하게 적힌, 중상위급 가격대의 계란을 택했다.
집에 와서 계란판을 열어 확인해보니 난각 번호 끝자리는 '4'였고 혁은 허탈해했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환경에서 몸이 부서져가며 끊임없이 알을 낳아야 하는 환경에서 어떻게 '1등급' 계란이 나올 수 있는 것일까. 닭의 몸을 통과해 태어난 알이 닭의 상태와 어떻게 전혀 무관할 수 있을까. 계란 코너 앞에서 혁의 고뇌와 혼란은 당분간 지속될 듯하다.
혼란스러운 난각 표시 시스템 탓에 혁의 '덜 해치는 소비 - 계란 편 1화'는 새드 엔딩으로 끝이 났다. 그래도 계란 앞에서 고민이 시작된 혁의 모습에서 나는 용기와 희망을 좀 얻었다.
요 근래의 나에겐 무기력함이 파도처럼 들썩거렸다. 내가 가진 재능, 쌓아온 경력, 노력해온 성취물들 어느 것 하나 반짝이는 게 없어 보였다. 채식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공장식 축산업에 저항하기 위해 십여 년 지속해왔다고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완벽한 기준에는 한참 못 미친다. 근본적으로 '나 한 사람의 입에 고기를 넣고 안 넣고라는 사소한 행위가 과연 공장식 농장의 동물 한 마리라도 구하고 있는 걸까'라는 물음 앞에 서면 한없이 작아졌다.
그러나 '내 입에 고기를 넣고 안 넣고'가 누군가에겐 하루 세 번의 대투쟁일 수도 있는 일이다. 내가 이것을 사소하게 여길 수 있었던 건 근래 가장 많은 끼니를 함께해온 혁 덕분일 것이다. 그와 제법 많은 밥상을 공유했지만 함께 먹는 동안 내가 채식을 지향하는 게 서로에게 불편함을 준다고 느끼게 한 적이 없었다. 우리의 겸상이 중첩되는 동안 그가 내 가치관을 전적으로 존중해주는구나, 서로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구나 하는 신뢰가 절로 쌓였다. 내 끼니의 전장이 덜 험난하다는 이유로 하마터면 채식이라는 행위 자체를 시시하게 여기는 우를 범할 뻔했다.
게다가 다소 미적지근한 내 생각이나 말 한마디에 누군가 관심을 갖거나, 영향을 받아 무언가를 시도해봤다는 후기를 들을 때면 내 채식의 쓸모가 조금이나마 증명된 기분이 든다. 어느덧 혁은 알아서 채식 만두나 비건 식재료도 척척 사고, 얼마전부터 주방 세제도 설거지 비누로 바꾸었고, 음식물 묻은 플라스틱 용기도 깨끗하게 씻어서 배출한다. 내가 몰랐던 좋은 정보나 관련 콘텐츠 소식을 종종 전해주기도 한다. 동생이나 친구들과도 간간히 이러한 일이 생긴다. 우리의 교집합들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이끌 것이라는 믿음이 생활 속에서 자란다.
혁과 나를 혼란스럽게 했던 계란 포장지 위의 일련번호와 계란 껍데기 위의 난각 번호는, 난각 번호 하나로 일원화될 예정이라고 한다(빠른 시일 내로 바뀌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것은 유통 현장의 개선 요구 때문이지만, 소비자들이 난각 번호를 더 쉽게 확인할 수 있게 되면 아마 또 조금씩 바꿔나갈 수 있는 부분들이 생겨나지 않을까 싶다. 난각 번호 시스템도, 계란의 등급을 나누는 체계도 혼란스럽지만 우리는 우리의 몫을 하면 되는 것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