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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 Mar 05. 2017

배꽃 같은 사람들

상처 깁기


2016년 겨울.

나를 포함한 네 명이 작은 호프집에 앉았다.

만남의 약속이 애초 있었던 날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네 명이 모여 앉게 된 자리였다. 12월이 막 시작되었던 그 자리에서 어떤 바람이 불었는지는 몰라도 내심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 차 있었다.


사실 이제 와서 생각해봐도 참 이기적인 행동이 아니었나 싶다. 그날 밤 그들에게 털어놓은 이야기로 인해 후회하며 괴롭게 느껴졌던 적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물론 그럼에도 그날이 내게 다시 주어진다면, 똑같은 마음으로 이야기를 할 것이 분명하다.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들이지만, 어쩐지 그들에게 털어놓고 싶은 생각이 하나 있었다.




2016년 초 병원을 떠나며 담당의가 질문을 하나 했다. 상담을 진행하던 중 나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던 담당의가 이런 이야기를 누구에게 한 적이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모든 이야기를 다 하진 않았지만 더러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대답하자, 담당의는 그럼 그들과 아직도 잘 지내느냐 물었다.

난 대답하지 않았고, 침묵으로 몇 분이 흘렀다. 담당의는 그 침묵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알겠다는 듯 말을 이었다.


또 같은 일이 반복될까 두려울 수 있겠지만, 그래도 스스로에게 벗어나기 위해선 대화를 하는 것이 좋다고.

나는 그런 사람이 생기면 꼭 그리하겠다고 말하고 오랜 기간 이어진 상담을 종료했다.  그런 사람이 생길 것인가 스스로 믿기지 않는 기분으로 적당히 내뱉은 대답이었다.


병원에 장기간 입원을 하며 그간 모아둔 많지도 않은 돈을 대부분 소진한 터라 일을 해야 했다. 무작정 시작한 일은 다시 일상을 처참히 망가뜨리기 시작했다. 적성에 맞지 않은 일이었지만, 아무 생각 없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무작정 돈만을 벌겠다고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주어진 일은 잘 해내고 있었지만, 사람들과 도저히 잘 지낼 수가 없었다. 얼마 가지 않아 일을 그만두었고, 세 달치 월급을 방바닥에 올려두고 이것으로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다.

한참을 고민했지만 당장 떠오르는 것이 없어 생각을 멈추고, 병원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병원에서의 일상은 대체로 따분하게 흘러갔지만, 그중 인상적이었던 한 가지가 떠올랐다. 미술 상담 치료시간에 그림을 다시 그리면서 느껴졌던 미묘한 떨림이었다. 그 길로 바로 그림을 그려보겠다며 소묘 학원을 등록했다. 꽤나 오랜 기간 그림을 그려왔지만, 요즘처럼 몰두해서 그림을 그린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많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밥벌이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만화가를 꿈꾸던 그때도 이렇게 열심히 하진 않았다.


그렇게 그림을 그리다 보니 여름이 되었다. 무척이나 더웠던 여름.

그려둔 그림을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가 블로그에 그림을 올리기 시작했다. 블로그에 그림을 올리기 시작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모니터 너머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몇몇 사람들과는 친분도 생겼다. 그림을 이야기하고 대화를 하는 것이 즐거워졌다. 그쯤 다시 시작한 일은 나름 삶에 활력을 줄만큼 괜찮았다. 일상이 다시 제대로 돌기 시작한 기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생겨났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 살고 싶었다. 생활은 해야 했기에 도시에서는 살아야 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지금의 동네였다.  인구 100만이 넘었다는 현수막이 여기저기 붙어있는 사람 많은 도시였지만, 그 안에서 도시 속 은둔자와 같은 삶을 이어갔다. 그렇게 1년 정도를 지냈고, 병원에 들었을 정도로 망가져버렸던 내게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변화는 꽤나 놀라운 일이었다. 용기를 내서 만나자는 메시지를 보냈다.


정말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 변화를 수용해 간다는 것이 스스로도 놀라웠고, 기분이 좋았다. 몇 번의 만남을 가졌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모든 만남이 좋았느냐 물으면 물론 그렇지 않은 날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대체로 충만함과 기분 좋은 감정을 갖게 한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겨울이 찾아왔고, 그날 네 명이 예정에 없던 만남을 가지고 호프집에 앉았다. 급히 모인 자리에 계획되지 않은 장소에서도 우린 웃는 얼굴로 서로를 대면했다. 만남을 이어간 지 몇 개월 되지도 않았는데 어찌 이리 반가울 수 있는지.




가볍게 맥주를 마시다 어느 순간 내면에 바람이 일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라는 담당의의 충고가 떠올랐다. 그때 세명의 얼굴을 한 번씩 보았다. 비록 무거운 이야기로 버거운 대화가 되겠지만, 이 사람들에게 이야기가 하고 싶어 졌다.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언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때를 고르던 내게, 일행 중 한 분이 그간 어떤 일이 있었냐는 질문을 내게 건넸다. 그 질문에 대답을 하겠다는 명목을 핑계 삼아 하지 않아도 되었을 많은 이야기를 꺼냈다.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분위기는 무거워졌다. 말을 이어가고 있는 자신도 느껴질 만큼 공기가 가라앉았다. 그러면서도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그분들께 너무 죄송했다. 사람이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또 나보다 더 좋지 않은 상황임에도 훌륭하게 살아가고 있는 분들이 많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저마다 삶의 무게가 다르듯 그 무게는 모두 다른 법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삶을 살아았다. 망가지고 얼룩지던 시절의 이야기는 꽤나 무겁게 입에서 흘러나와 세 사람의 공간을 무겁게 만들었다. 내게 무게가 다르다 느껴지던 삶은 그들에게도 무거운 이야기가 되어 분위기를 흐려두었다. 마치 무거운 추를 달아 끌어내리는 듯 가라앉는 공기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왜 그런 이야기를 꺼내느냐 비난한들 별 수없다며 담담히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이야기를 멈췄다.

한동안 우리는 말이 없었다. 잠시 후 무섭다는 말도, 어떻게 그렇게 지냈냐는 말도 이어졌다.




그날 이후 나의 걱정과는 달리 다행스러운 한 달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그들과 잘 지내고 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기심에서 시작된 이야기였고, 쓸데없는 고백이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건네며 스스로 다짐을 한 것들도 많았다. 이만큼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났으니, 이제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방황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다짐이었다. 여전히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물론 앞으로도 아마 우울한 이야기는 종종할지도 모르지만, 털어낼 좋은 방법도 내 이야기를 들어줄 좋은 사람들도 만났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내 안에 담아두고도 싶어 졌다.


좋아하는 사람의 좋은 면만 보고자 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전부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모습만을 좋아하고 보려고 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 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이만큼 변했기에 이젠 희망하는 바도 과거와는 달리 소박해졌다. 그저 앞으로도 많은 그림을 그리고, 좋은 사람들과 오래 만나고 싶다. 그렇게 해서 더 많은 꽃을 피우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배꽃의 꽃말은 위로와 위안, 온화한 애정이라고 한다. 꽃말과 같이 배꽃 같은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나도 누군가에게 그리고 그들에게 배꽃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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