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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 Feb 12. 2020

출근 (성산 해녀)

당신은 어떤 뒷모습으로 출근하고 계신가요?


2019년 1월, 성산을 지나다 물질하러 들어가는 해녀를 보았습니다.

거친 바다로 들어가는 뒷모습이 고되게 느껴지더군요. 

언젠가는 그려볼 일이 있지 않겠나 싶어 사진을 찍어두었습니다.


그림과 관련된 일을 하며 내려온 제주인데, 1년 남짓의 시간이 지나고 슬슬 한계가 오더군요.

결국 더워지던 8월 무렵 디자인 회사로 입사를 했습니다.

그림 외에 먹고 살 방법을 찾아 스스로 배운 방법이 제주에서의 생활을 이어가게 해 주더군요.

다만 제주로 이주하면서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은 일이기도 했지만요.


그로부터 며칠 후 출근길에서 귤밭에 약을 치던 어르신을 보았습니다.

이른 오전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어쩐지 낯설지 않은 느낌이었어요.

이전 성산에서 만났던 해녀의 뒷모습이 겹쳐 보이더군요.


회사까지 1시간 남짓 달리는 버스 안에서 해녀와 농부의 닮은 뒷모습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업무를 하다가도 생각이 떠나지 않아 중간중간 스케치를 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삶을 이어가기 위해 노동을 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대체적으로 닮은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았고요. 또 현재 저의 뒷모습은 어떨까에 대해서도 고민해보았습니다.


딱히 결론이 나진 않았지만 출근이란 제목으로 그림을 그려보자 마음먹었습니다.


이후 친구와 함께 구좌, 성산, 표선, 남원까지 다양한 곳을 돌아다니며 해녀가 드나드는 길목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근처에 가장 가까운 바다를 정해 그림을 시작했죠. 


내 뒷모습은 어떠한가에 대한 어떤 답을 내리지 못했지만 그리는 도중 그것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색연필을 깎는 중간중간 계속해서 그림을 바라봤습니다. 


실체가 없는 구름과 같은 산을 넘듯 매일 출근을 하고 돌아와 그림을 그리곤 합니다.

차가운 바다로 목숨을 걸고 들어가는 해녀에 비하자면 안전한 사무실에서 업무를 하는 제 노동을 빗댄다는 것이 몹시도 주제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그런 생각에 저에 대한 대답을 찾진 못한 것 같습니다.


새벽 3시면 콩나물 공장으로 향하는 아버지와, 귤밭으로 향하는 농부, 바다로 향하는 해녀의 뒷모습이 모두 닮아있어 익숙하게 느낀 것은 아니었나 싶습니다. 


어떤 위치에서 있던 삶을 위해 묵묵히 이어가는 노동은 대단한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랜 기간 꿈꿔오던 그림과 관련된 노동을 하지 못하는 지금의 제 모습을 꿈을 이루지 못하고 낙오된 패배자라 느끼며 부끄러워했습니다.

또 못난 자존심에 매번의 노동을 잠시 멈춰가는 분기점이라며 소중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던 모양입니다.

물론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남의 돈을 받는 것이라며 허투루 일을 하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던 것이 그런 이유에서였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니 매번의 출근이 떳떳하지 못했던 것이겠지요.


그쯤에서 오래전 일화가 떠올랐습니다.

오래전 의수화가 '석창우'화백님을 찾아뵈었을 때 사모님께서 준비해주신 보이차를 나눠마시며 일과 그림에 대해 고민하던 저에게 나눠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이라면 일을 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것도 좋습니다. 이를 너무 나누려고 하다 보니 힘이 드는 것인데, 일을 하는 것들도 그림을 그리기 위한 과정이라 생각하며, 그림에 대한 생각을 놓지 않으면 일상 전부를 그림으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일도 그림도 그날 하루의 온전한 삶이 됩니다."


당시 저는 그날 일화를 잊지 않겠노라 블로그에 적어두었지만 어느새 잊어버리고 삶을 위해 매번의 출근길을 그리 의미 없이 걸어갔던 모양입니다.




매일은 아니라도 한 달 넘게 틈틈이 그렸지만 분명히 더 해야 할 지점들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들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답을 찾지 못한 채 그림을 멈춰야 했습니다.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이번 그림은 여기까지다 싶은 순간들도 있는 법이겠죠. 이전 그림들도 아쉬움을 많이 남겼지만, 이번 그림은 유독 더 많은 크기의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거친 바다로 향하는 해녀처럼, 매일 새벽 콩나물 공장으로 향하는 아버지처럼 누군가에게 익숙하게 보이는 뒷모습으로 보이면 좋겠다는 꽤나 좋은 마음가짐을 가지게 한 그림입니다. 


2019년 마지막 무렵에 시작된 그림은 2020년 첫 그림이 되어 끝이 났습니다.

저는 여전히 실체가 없는 구름과 같은 산을 넘듯 출근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전보다는 보다 꼿꼿이 허리를 펴고 걷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전히 그들에게 빗대기엔 비루한 등짝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요.




https://www.youtube.com/watch?v=I3_0zjpAUdM&t=11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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