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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 Mar 24. 2017

사랑하는 데는 이유가 없다.

Green - Paul Verlaine


그린 Green - 폴 베를렌 Paul Verlaine


열매, 꽃, 잎, 가지들이 여기 있소.

그리고 오로지 당신만을 향해 고동치는 내 마음이 여기 있소.

그대 하얀 두 손으로 찢지는 말아주오.

다만 이 순간 그대 아름다운 두 눈에 부드럽게 담아주오.


새벽바람 얼굴에 맞으며 달려오느라

온몸에 얼어붙은 이슬방울 채 가시지 않았으니 

그대 발치에 지친 몸 누이고 

소중한 휴식의 순간에 잠기도록 허락해 주오.


그대의 여린 가슴 위에 둥굴리도록 해주오.

지난번 입맞춤에 아직도 얼얼한 내 얼굴을, 

그리고 이 선한 격정이 가라앉게 그대 달래주오.

그대의 휴식 속에 가만히 잠들 수 있도록.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데는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남녀가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남자가 남자를,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일들도 생겨난다. 짝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거나 혹은 통념상 허락할 수 없는 사랑들도 세상에 숱하게 널려있다. 


평범하지 못한 사랑을 하며 굴곡진 삶을 살았기 때문일까. 폴 베를렌은 자책과 비관, 절망과 사랑을 담아내며 시인의 왕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폴과 랭보의 사랑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의 시만큼이나 유명한 이야기다. 혹은 위대한 시보다도 유명한 일화일지도 모르겠다. 


21살,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지하철을 타야 했다. 제법 긴 거리가 지루하지 않도록 아무렇게나 집어 든 책에 폴 베르렌의 시가 있었다. 당산을 지나 한강을 건너던 지하철의 문가에 기대서 내리쬐는 햇빛 사이로 폴 베를렌의 그린이란 시를 읽었다. 


당시에는 이 시가 어떤 이유로, 누굴 위해 쓰인 시인지도 몰랐다. 그저 마냥 이 시가 좋았다. 그저 절절하고 애달픈 사랑을 담아둔 마음 하나만이 가슴 깊이 박혔다. 

나는 보통의 사랑을 하는 사람이지만 동성애에 관련된 그의 일화를 보고, 세간의 입에 오르는 사랑이었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너무도 절실한 사랑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절절하고, 가슴 시린 아름다운 시를 쓸 만큼 사랑했었구나 싶었다. 


이 시를 계기로 앞서 말했듯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데는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 없이 그저 푹 빠져서 사랑에 허우적거리게 되는 것이라고. 갑작스럽게 발생한 사고처럼 마음이 움직여서 별수 없게 되는 것뿐이라고. 그렇게 별수 없이 사랑에 빠지는 것뿐이기에 잘못하는 것이 아니라고. 어쩔 수가 없는 것이라고. 




우연히 보았던 사진 한 장. 성경 위로 놓인 반지와 그 반지가 만든 특별한 궤적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 궤적을 따라 갑작스럽게 어린 시절 읽었던 폴 베를렌의 시가 떠올랐다. 


한강을 건너며 읽던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펜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오늘은 그날의 기억에 더해 조금 다른 기억도 덧붙여 두기로 했다. 훗날 갑작스럽게 폴 베를렌의 시가 생각난다면, 이 그림도 함께 좋은 기억으로 떠오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더불어 나에게도 간절히 온몸을 다해 사랑할 수 있는 순간이 오기를 간절히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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