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를 고쳐줄 거라 바라던 때
당신의 뼈를 불태울 거예요. 따뜻하게 해줄게요. 내가 당신을 치유해 줄게요.
콜드플레이(COLDPLAY)의 Fix you를 처음 듣고 오랜 기간 그 노래 하나만을 듣고 돌아다녔던 적이 있다. 현재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로 꼽기도 하는데, 치유를 담고 있는 있는 가사가 오랜 기간 내 안에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울렸다.
태어나 얼마 되지 않아 집안에 큰 화재가 났다. 형광등이 나가 촛불을 켜두고 형광등을 사러 가기 위해 부모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일어난 화재였다. 놓인 촛불이 너무도 신기해서 만져보던 세 살배기 아이의 손에서 이불로 옮겨 붙은 화재로 인해 집은 전소되었다.
뒤늦게 도착한 사람들로 인해 불길에 갇혀 울고 있던 두 남매는 구조될 수 있었다. 큰 화재는 아이의 이마에 큰 화상을 남겼지만 다른 부분은 멀쩡했다. 사람들은 그나마 다행이라 부모와 아이를 위로했다.
세 살배기 아이의 이마에 화상이 들러붙던 그날, 우울과 괴롭게 살아갈 운명이란 낙인이 찍혔나 보다.
꼬리표처럼 그런 질문이 따라붙었다. 이마의 흉터는 어째서 그런 것이냐고.
화재의 순간이 너무도 강렬한 기억이라 세 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생생히 떠오르는 부분이 있다. 아니 어쩌면 이것은 내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자라며 계속해서 들어온 말로 인해 재구성된 기억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날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물어오는 질문에 언제나 다른 존재가 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인지 다르지 않다고 변명하듯 당시의 사건을 생동감 있게, 듣는 이가 흥미로울 수 있게 설명하곤 했다. 상황 묘사가 점점 발전하고 디테일해졌으며, 현장감이 감도는 그런 방법들을 터득해갔다. 이윽고 별것 아닌 재미난 일화였던 듯 너스레를 떨며 위트까지 곁들일 정도가 되었다.
그런 이야기가 듣기 좋았던지 대체로 흥미롭게 이야기를 들었다. 나 역시 재미있게 말하는 재주가 있는 모양인지 한껏 흥미를 돋우고 즐거운 기억인듯 말했다. 하지만 그럴때마다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이 쌓이듯, 어떤 감정들이 조용히 내면에 내려앉곤 했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부분에 무뎌져갔다. 아니 극복했다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이마의 흉터는 왜 그런 것이냐 물어도 이전처럼 꺼려하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따금 그들의 곁에 함께한 이들의 말들이 나를 건드린다.
왜 그런 걸 물어보고 그래.
내가 상처받을까 걱정되어 말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그들의 나름 배려인 셈이다. 하지만 이제는 극복했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말이 날아들면, 미묘한 틈을 가르며 가슴에 박히는 감정을 경험하게 만든다. 역시 나는 달라 보이는 것일까? 이상한 존재일까? 어디서부터 이런 존재가 되었을까?
집이 전소하고 우리 네 가족은 여러 집을 전전해야 했다. 가난했고 형편은 나아지질 못했다. 좋지 않은 형편을 저주하며 부모는 매일 밤 술을 마셨고, 술에 취한 그들은 매번의 싸움을 반복했다.
집안의 온갖 물건이 날아들고, 서로 엉겨 붙어 싸우는 혼돈의 덩어리 같은 모습이 매일 같이 두 아이의 눈 앞에 펼쳐졌다.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못한 나이의 두 아이는 혹시 모를 사태를 염려하며, 칼을 숨기고 박살난 유리 조각을 내다 버렸다. 겨우 그 정도가 할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계속 이어진 다툼 끝에 부모는 이혼했고,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향하면서 아이들은 친척의 집에 맡겨졌다.
오랜기간 이어진 불안과 맡겨진 아이가 감당하기 힘든 눈치로 인해 우리는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극심한 스트레스와 따돌림을 받으며 자랐다.
학년이 두번 바뀌고 나서야 아이들을 키우겠다며 재결합한 부모에 의해 우린 친척집을 떠날 수 있었다.
그런 끔찍한 생활에서도 부모가 그리웠던 모양이었는지 내심 앞으로는 행복할 것 같다는 희망을 품으며 몇년 만에 부모를 만났다. 하지만 그런 희망도 얼마 지나지 않아 박살 나고, 이전처럼 박살난 집안 구석에 서로의 순을 잡고 울고 있는 현실을 되풀이 해야만 했다.
여전히 칼을 숨기고 잔해들을 내다 버렸다. 사흘이 멀다하고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사적으로 그런 행동을 반복했다. 그리고 어느덧 두 남매는 부모가 싸운다고 더 이상 우리 않는 나이가 되었다.
여느 때처럼 깨어진 유리를 치우다 반짝이며 날카롭게 빛나는 단면에 마음이 동했다. 어쩐지 그 미세한 틈 사이로 비친 내 눈빛을 보이는 듯싶었다. 공허하게 비워져 삶이 느껴지지 않는 눈빛 같았다.
깨어진 유리를 손목에 대고 지그시 눌러 빠르게 잡아 당겼다. 뼈만이 앙상한 손목위로 틈이 갈라지고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영화에서처럼 피가 뿜어져 나오거나 바닥에 후드득 떨어지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벌어진 거죽의 틈 사이로 하얀 속살이 잠시 정적처럼 드러나 빛날 뿐이었다.
잠시 그런 정적을 유지하더니 이윽고 붉은 반점이 솟아 올라 뭉치더니 붉은 강이 팔 위로 굽이치듯 흘러내렸다. 일순간 정적을 깨고 흘러내리는 붉은 강이 팔에 그리는 궤적은 몹시 아름답게 느껴졌다.
아이의 팔에 피가 쏟아져 내리자, 부모는 싸움을 멈추었다. 응급차가 오고, 나는 병원으로 옮겨졌다. 가벼운 자상으로 10 바늘 정도를 꿰매고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부서진 가사도구의 잔해들의 틈 사이에 웅크리고 누워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한 잠이 들 수 있었다.
매일 같이 싸움일 일어날 때마다 나를 가지지 않았으면 결혼도 하지 않았을 거라 소리치던 말로, 존재 자체가 부정되던 삶을 살아오던 내게, 그날 아이를 돌보던 부모의 행동은 적잖은 감동마저 느끼게 해주었다.
다시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의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고, 나는 이전의 행동을 반복했다. 상처는 싸우는 횟수만큼 아니 그 이상 늘어나기 시작했다. 팔은 거친 나무뿌리가 얼기설기 굽이치며 뻗어 나듯 상처가 생겨났다.
어느 순간 그런 행동에 익숙해진 탓인지 부모는 더 이상 아이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그들은 그들의 울분에 집중해서 엉켜붙어 싸움을 계속했다.
아이 역시 이제는 자신을 돌봐주길 바라지 않았다. 그저 매일 같이 상처가 늘어났다. 처음 상처를 마주할 때 느꼈던 희열은 갈수록 강해고, 유일하게 살아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오직 그때뿐이라 믿기 시작했다.
그 희열은 부모가 싸우지 않아도 필요한 습관이 되어 마음과 팔 위로 내려앉았다.
평생 그림을 그리며 살겠노라 마음먹었지만, 세 살 때 불행이란 낙인을 받아버린 탓인지 대학 진학에 실패했다. 집안이 그 모양이니 애가 그렇지라는 손가락질을 받고 싶지 않아 부단히 공부를 했지만, 대학은 쉽게 내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미술학원을 다닐 돈은 없었고, 실기를 보지 않는 수시 모집에서 색각 이상의 문제를 안고 있던 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없었다. 아버지로부터 유전된 색각 이상 문제는 결국 나의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유전된 색각이상, 화재로 인한 화상, 이어진 불화와 잦은 싸움은 계속해서 내 안을 갉아먹으며 모든 것을 공허하게 만들었고, 나는 그때마다 살아있다는 감정과 느꼈던 삶의 희열을 반복해서 찾았다.
결국 아르바이트가 없는 시간에는 멍하니 바닥에 누워 있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방바닥에 먼지처럼 눌어붙어 이전을 회상하곤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길래 나에게 이토록 가혹한 것인지. 저마다 삶의 무게가 다르겠지만, 나의 삶의 무게는 어째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만큼의 무게만이 자꾸만 주어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름답게 팔 위로 굽이치는 붉은 선을 바라보며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이 부끄러웠다. 이런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 부끄러웠고, 이런 희열을 알게 한 부모는 원망스러웠다.
현실에 벽에 걸려 넘어지게 한 색각 이상이란 운명이 가혹했고, 바스러진 꿈을 바라보며 부모를 원망했다.
가장 인상적인 유년시절의 기억이 잔해 속에 울던 아이의 모습이란 사실이 끔찍했고, 그런 기억을 곱씹으며 부모를 원망했다.
가난함에 매일 같이 다투던 부모가 원망스러웠다.
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 가난이라면, 세 살배기 아이가 저지른 화재로 인해 그런 것 같아 슬펐다. 그리고 나를 임신하지 않았으면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란 말에 결국 모든 원인이 나에게 있을 것이란 생각으로 번졌다.
그런 생각들이 쌓여갈수록 점점 면도기를 분해해서 칼날을 분리하는 것에 능숙해졌다.
그런 행동들을 반복하면서도 나는 결국 죽지 못했다. 아니 죽으려고 한 행동들이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살아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유흥에 지나지 않았다.
무수한 상처들은 가지고 비척거리는 삶을 마지못해 살아가면서 계속 죽지 않고 버텨 왔던 단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기다림이었다. 언젠가, 어느 순간에, 누군가가 나를 위로하고 구해줄 것이란 기다림. 그런 기다림의 끝에 누군가 나를 치유하고 살아갈 희망을 불어넣어줄 것이라 고대하며 겨우 겨우 삶을 이어 갈 수 있었다.
몇 번의 만남에 잠시 몸을 누이고 쉬어갈 수 있었지만, 결국 이어진 이별에서 다시금 예전을 반복했다. 이별이 가져다준 상실감에 이전보다 더욱 괴로워하면서도, 여전히 어디선가 나타날 누군가가 나를 온전히 이해하고 바라보며 치유해 주기를 기다렸다. 상처를 마주하고 어루만져주며, 내 잘못이 아니었다고 말해주길 숨죽이며 기다렸다.
그렇게 다시 십여 년의 삶을 더 살았고, 이번엔 정말 마지막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곁을 떠날 때, 여느 때보다 깊은 상처를 몸에 그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할만큼의 상처로 인해 바닥에 쓰러져 병원을 실려갔다. 응급처치와 검사, 시술이 진행됐다. 어쩐지 긴박했던 상황이 벌어진 그날 차가운 간이침대에 먼저처럼 누웠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건 타인이 아니라 어쩌면 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그다음 날 정신과 폐쇄 병동 입원 서류에 서명을 했다.
다시 일년여가 지났다. 삶이 놀랍게도 빠르게 정상궤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숱한 자해의 역사를 마치고 병원을 퇴원한 나는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살아가고 있다.
더 이상 마지못해 이어가는 삶이 아니라 그림과 글을 통해 스스로를 치유하는 삶을 이어가고 있다. 세상이 그렇게 매일 잔잔히 돌아간다. 하루하루 그림을 그리며 내 안에 우울을 조금씩 털어내고 있다. 그렇게 매일 조금씩 새로운 삶 위로 한 걸음씩을 내딛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상처를 마주하고, 내 잘못이 아니었다고 말해줄 누군가를 기다리며,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습관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