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쓰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라 Aug 25. 2017

에스키스

언젠가를 위한 오늘의 초안


에스키스는 작품을 구상하게 위해 그리는 여러 가지 초안이나 밑그림을 말한다. 

관심이 생긴 공모전이 있어서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에스키스를 떴다.  


큰 그림을 그리기 전에 이렇게 에스키스를 뜨는 것이 분명히 도움이 되지만,

이렇게 에스키스까지 그려가며 준비한다고 해서 매번 결과가 좋으리란 법은 없다. 

그래도 이렇게 크게 그리기 전에 워밍업을 하듯 뭐라도 그려보면 조금은 두려움이 덜해진다.







이렇게 에스키스를 그리며 준비를 했다고 결과가 좋으란 법은 없다.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지 모른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하다 보면 조금은 더 나은 결과물을 얻지 않을까 기대를 하게 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에스키스부터 결과가 좋지 못했다.


펜은 곱지 못했고, 수채화는 엉망으로 보였다. 원하는 분위기와는 너무도 다른 그림이 되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렇게 그리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반면 이렇게 그리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앞으로는 어떻게 그려야 할지 더 큰 고민이 밀려왔다.


그렇게 3일이 넘도록 저 에스키스의 언저리 어디쯤에 헤매고 있었다. 

그림을 완성해야 할 시간은 정해져 있는데, 나는 더 이상 앞으로 가지 못하고 멈춘 채 시간만 자꾸 흐르고 있다.


어쩌면 좋은 기회일지도 모르는데 또 이렇게 기회를 날려버리는 것일까...

물론 공모전에서 무엇이라도 해 볼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위해 달려보는 것은 해보지 않는 것에 비해 적어도 기회라도 가져보는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마음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그림을 그리면서 그리는 과정이나 담아내는 것들이 참 삶과 닮아 있는 부분들이 많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생각해보면 그간 내게도 숱한 기회들이 손을 내밀었을 것이다. 그것이 그림이던, 글이던, 만남이던, 사랑이던 말이다. 지금의 내 모습을 보자면, 분명히 그 기회들을 잘 붙잡지 못했던 것만 같다. 


결과를 떠나 기회를 잡는 것, 기회를 잡기 위해 노력해보는 것이 소중한 줄 몰랐고, 그런 기회를 위해 많은 노력과 연습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은 채 너무 많은 시간을 허송세월로 보내버렸다. 


준비된 자는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잡는 법이고,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잡기 위해 오늘을 열심히 준비하라고 한다. 나는 그런 기회들을 얼마나 모른 채 지나쳐 버렸을까. 


그림도, 글도, 만남도, 사랑도 말이다. 


그러면서도 에스키스의 언저리에 머무른 채 여전히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조금도 성장하지 않았구나 싶은 자책마저 느껴진다.






엉망이 된 에스키스를 바라보며 겨우 이 정도의 그림을 그리면서 참 별 생각을 다한다. 매사 이렇게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며 다리를 붙들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질질 끌리는 기분이다.


참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요즘이다. 반대로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마치 그런 요즘처럼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은데 어디서부터 잘못되어 다시 시작해야 할지 몰라 에스키스를 쳐다보며 계속 서성거리고만 있다. 


정말 잘하고 싶다. 그림도, 글도, 만남도, 사랑도, 부질없을 이런 생각들 조차도.

그런 생각에 겨우 에스키스가 그려진 종이를 치우고 새로운 종이를 꺼냈다. 

결국 오늘도 내일도 습작과 에스키스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제대로 그려질 무엇을 마주할 때가 언젠가는 올지도 모르지.


결국 내 일상도 이런 것과 비슷할 것이다. 

누군가에는 겨우 이런 그림, 이상한 생각, 우울한 속내와 치기 어린 마음, 그것들이 똘똘 뭉쳐진 좋지 못한 성격... 


혹은 보이지도 않고, 읽히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잊힐만한,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힘이 들고 유지하며, 부질없는 것, 또는 괴팍하고 끔찍하리만큼 엉망이거나 너무도 모자라서 불성실하고 그래서 더욱 의미가 없어 실망스러울 나아가 절망마저 느껴질, 혹은 반대로 한숨조차 나오지 않을 그런 가치조차 없을지도 모르지만... 


매일의 일상 위로 삶과 그림, 그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 에스키스와 습작을 반복하다 보면 좋아질 때가 올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언젠가는 누군가 조금이라도 괜찮다고 말해줄, 또 그간의 세월을 낭비해버린 자신을 용서하게 될 때가 올 것이란 희망을 꿈꾸고 있어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여전히 현실은 엉망이 되어버린 에스키스 위에 놓여있다. 그러나 분명 나는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게 될 것이다. 삶을 계속 이어가며 연습하고 노력한다면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바람이 지나는 길목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