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덩이 Apr 04. 2023

신입행원과 선임들

퇴사 썰의 시작

"너는 거미형 몸매구나"


놀랍게도 같은 여성직원에게 들었던 말이다. 꽤나 높은 직급에 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그녀는 지점의 공주님이었다. 부지점장까지 그녀에게 쩔쩔맸던 것이 신입행원의 눈에는 퍽이나 이상하게 보였다. 실력도 좋아서 모두에게 예쁨을 받던 그녀는 아랫사람에게는 안타깝게도 안하무인이었다.


유니폼을 입고 일하는 체계였기에 출퇴근 시 사복은 주로 바지를 입고 다녔다. 가방도 비싼 메이커 가방보다는 홈쇼핑에서 싼 중급 가방이었다. 그녀는 이상하게 나의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 왜 치마를 안 입냐, 명품에는 관심이 없냐 등의 질문을 하면 그래도 성실하게 답해줬다.


그 후로는 질문의 강도가 조금씩 높아졌다. 나의 가슴이 몇 컵인지 물을 때도 있었다. 우리가 이런 얘기를 공유할 정도로 친했던가? 어느 날은 나보고 거미형 몸매라 했다. 팔다리는 얇은데 까지만 얘기했지만 그 뒤에 하려던 얘기가 무엇인지를 알 것만 같았다. 복부에만 살이 붙는 체질이기도 하고 가슴이 다른 사람보다 큰 편인 것도 맞다. 그것을 빙빙 돌려서 거미형 몸매를 언급한 것이다. 정말 수치 그 자체였다.


"야." 그녀가 나를 부르던 말이다. 메이저 은행의 금융센터. 일개 사원이 신입을 향해 부르는 단어치고는 급이 떨어진다. 내 몸매를 얘기할 때도 "야", 일을 할 때도 "야"다. 태어나서 누구에게 야라고 불려본 것이 몇 번 안 된다. 대학 때 야 너 인마 게임 정도랄까. 그녀는 지점을 떠날 때까지 나를 그렇게 불렀다.


그다음은 전화 문제다. 그녀는 나와 다른 창구에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하던 업무 일체를 나는 일절 알지 못한다. 그녀를 찾는 전화가 가끔 나에게 잘못 걸려올 때가 있었다. 그러면 나는 그녀에게 메모를 남겼다. 고객 이름과 전화번호, 용건과 전화 가능한 시간을 적어 메신저로 보냈다. 그러면 그녀는 그렇게 화를 냈다. 다른 창구 전화여도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지 않냐의 뜻이었다. 마케팅부 신입에게 회계부 쪽 간단한 일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지 않냐, 인사부 신입에게 전산부 일을 알아서 처리해라 식의 얘기다. 그래도 직급이 낮다면 시키는 일을 해야지 별 수 있나.


그래도 가끔은 사원이 같은 사원에게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녀는 화가 날 때 윽박을 지르고 나를 비웃었다. 본인이 일을 배우면서 스트레스를 받으니 내 사수처럼 약한 자에게 푸는 것 같이. 얼토당토않는 얘기를 해서 내가 입을 다물면 대답을 안 한다 몇 배는 뭐라 했던 기억이 난다. 작은 오기가 꺾여버리는 순간이다.


결국에 그녀도 몇 년이 지나 사과를 했다. 지금 보면 내가 알아서 잘하고 참 착실한 후임이었는데 본인이 그걸 그때는 몰랐다 하더라. 생일에 이모티콘도 보내주고 사과도 두 번이나 했다. 그래서 그녀에 대한 증오는 사그라들었으나 그때의 내가 안타까울 뿐이다. 


내 사수도, 그녀도 결국에는 내가 첫 후임이었다. 부모도 부모가 처음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그들도 후임은 처음이라 어떻게 대할지 몰랐나 보다. 모든 부모가 좋은 것은 아닌 것처럼 그들도 어쩌다보니 좋은 선임들은 아니었지만... 그 당시에 나는 양쪽에서 들이닥치는 괴롭힘으로 나에게 문제가 있다 생각했었다. 그래도 내가 뭐라 하지 않았음에도 그들이 먼저 사과를 해온 것을 보면 내 잘못이 아니었음에 안심하게 된다. 그냥 힘이 없었다는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랄까.

작가의 이전글 신입행원과 사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