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로를 재탐색합니다
은행원에서 대학원생.
급정거를 하고 유턴을 하는 것과 같은 전환이다.
심지어 나는 금융이나 회계 관련으로 연구를 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학부에서 미디어를 주전공으로, 경제를 이중전공으로 공부했다. 이중전공 덕에 은행원 자리를 꿰차고 4년 동안 월급을 받으며 대출 일을 할 수 있었지만, 언제나 나와는 맞지 않는다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다. 적성에 맞지도, 그렇다고 보람 있지도 않은 일을 평생 하기에는 내 한 번뿐인 인생이 조금 아까웠다. 나중에 내 인생을 돌아봤을 때, 딱 20대 중후반인 이 시점에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한 것을 후회할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금융과 경제를 벗어던지고 미디어 연구자로서의 길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새로운 도전이었다. 이제야 막 은행에 적응한 시점이기도 했다. 신입 딱지를 떼고 남자 동기들은 대리 직급을 달고, 나 또한 상사들에게 기죽지 않고 내 커리어를 쌓을 수 있는 적정기였다. 웬만한 대출 케이스들은 다 경험해 봤고 규정도 대부분 숙지했기에 상사들의 교육이나 도움이 크게 필요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말했다. "은행원이 어디야. 월급 꼬박꼬박 나오지, 해고 안 당하지, 보너스 나오지. 이만한 직장이 어딨어." 그러면서 이제 나는 결혼을 할 나이라 새 길을 찾기보다 신랑감을 찾아 안정적인 인생을 꿈꾸라 했다.
틀린 말 하나 없다. 안정적인 직장, 안정적인 인생. 그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러나 생각해 봤다. 하루에 근무시간 최소 9시간. 야근까지 포함하면 해가 떠있는 시간은 무조건 직장에 있는 거다. 그 시간을 "안정"이라는 이유만으로 참고 견딘다면 과연 미래의 나는 행복할까?
나의 아버지는 그런 생활을 했다. 덕분에 상무 직급까지 올라가셨지만 퇴근한 아버지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항상 묻어있었다. "외롭고 지치고 힘들지만 어떡해. 아내와 자식이 있는데. 버티고 견디다 보면 뭐든 해."라고 드라마에서는 얘기한다. 아버지도 분명 그런 말들을 평생 들어오셨을 거다. 그래서 아버지를 존경해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인생을 살 자신이 없었다. 아니,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지금의 난 배우자도 자식도 없다. 나이도 27이라 도전을 하려면 지금이 마지막 시기일 수도 있다. 물론 대학원을 택했을 때 먼 훗날 아, 그때 은행 다닐걸이라는 후회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은행을 계속 다녔을 때 주름 잡힌 입가와 미간을 가지고 아, 그때 원하는 거 해볼걸이라는 후회가 몇 배는 더 클 것이라는 걸 알았다.
퇴사 후 취업을 생각했을 때는 도망이었다. 그러나 대학원은 도망이 아니었다. 내가 원해서, 해보고 싶어서 하는 도전이었다. 할 수 있을 때 하고 싶은 걸 하는 것은, 특히나 책임질 무언가가 없을 때, 놓칠 수 없는 기회다. 나는 안정 때문에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항상 원하는 것은 갖고야 말던 내가 아닌가. 고민의 순간은 길지 않았다.
결심하자마자 행동으로 옮겼다. 전 남자친구의 도움으로 유학원을 찾아갔고, 다른 유학원과의 비교를 위해 휴가를 쓰고 강남으로 가서 여러 군데를 돌아다닌 후 한 곳을 골랐다. 휴가를 놀기 위해 쓸 때가 아니었다. 미래를 위해 쓸 시간이었다. 그리고 IELTS 시험을 봤다. 원하는 점수를 얻었다. 그리고 어떤 국가에 어떤 대학원을 지원할지 알아봤다.
한국에 머물기는 싫었다. 내가 있던 미디어 대학이 한국에서 제일 좋은 곳이었는데 사실 크게 만족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이중전공을 경제로 택한 거기도 했다. 그리고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새로운 문물로, 새로운 학계로,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로 눈을 틔워놓고 싶었다. 한국이라는 작은 우물을 벗어나겠다 생각했다. 실제로 2021년 1월, 고등학교를 같이 나온 15명의 친구들과 단체로 영상통화를 했다. 그중 절반은 해외에 있었다. 물론 외고 영어과를 나와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들이 부러웠고 나도 같은 걸 경험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대학원 진학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