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연애부터 롱디, 유학 중 이별까지
나의 연애 역사는 단편적이다.
내 나이가 20대 후반인만큼 친구들은 이제 4분의 1 정도 갔거나 이제 갈 준비 중이다. 다들 고학력자고 로스쿨을 나온 만큼 조금 더 늦어졌다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나는? 나는 싱글이다. 빛이 나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그냥 혼자 고목나무처럼 서있을 뿐이다. 내가 초라하지도 불쌍하지도 않다. 오히려 기댈 사람이 없어지면 나 스스로가 기댈 필요가 없어질 정도로 튼튼해짐을 느낀다. 마치 아기가 엄마가 근처에 있을 때만 우는 것처럼 말이다. 울어도 봐줄 사람이 없다 느껴지면 넘어져도 혼자 훌훌 잘만 털고 일어난다. 지금의 내가 그렇다.
나의 첫 연애는 대학교 1학년 때였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연애하면 인생 망하는 줄로만 알고 있어서 연애할 생각도 시간도 여력도 없었다. 그리고 대학교 들어서자마자 봄에 미팅을 하고 그 미팅에서 S를 만났다. 사실 S를 떠올리면 미안한 마음뿐이다. 좋아하는 마음이 뭔지 사귀는 게 뭔지도 몰랐던 나는 그의 고백을 덥석 물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것에 대한 기쁨이 아닌 그냥 누군가 고백을 해서 내가 연애를 한다라는 기쁨이었다. 상대가 누구든 상관이 없었단 말이다.
그런데 아뿔싸. 사귀면 좋아질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나는 스킨십에 대한 굉장한 두려움이 있더라. 꿈에도 몰랐다. 그와 손 잡으면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것 같아서 손 잡는 것조차 피했다. 그리고 S는 그걸 또 이해하는지 손목을 잡아줬다. 그리고 50일이 지난 어느 날 그는 참다못해 우리 집 앞으로 왔다. 분위기라는 것을 1도 모르는 19살의 나는 그냥 친구가 놀러 온 듯 그를 대했고 그는 아파트 현관 앞에서 뽀뽀를 시도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입술이 닿기 전에 뒤로 멀찍이 물러섰다. 반응 속도는 왜 이렇게 빠른 거야. 사과를 하고 나는 바로 집으로 갔고 그다음 날 그의 집 앞으로 찾아가 나는 이별을 고했다. 그에게도 나에게도 못할 짓이라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그 이후에 나는 사랑 없는 연애는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두 번째 연애까지는 덕분에 아주 오래 걸렸다. 대학교 4학년이 돼서야 했으니 말이다. 그 사이 미팅도 여러 번, 소개팅도 여러 번 나갔으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날 좋아하지 않았고, 날 좋아하는 사람은 내가 좋아하지 않았다. 얼마나 뻔한 스토리인가. 그래도 함부로 사귀고 그런 짓은 하지 않기로 했다. 마음도 몸도 시간도 정성도 정말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었다.
그러다 J가 나타났다. 마지막 학기만을 남겨두고 인턴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나를 잘 알고 있던 오빠가 소개팅을 시켜줬다. 나랑 아주 비슷하고 관심사도 맞을 것이라 했다. 신촌으로 그를 보러 나간 나는 첫 만남에 그가 내 남자친구가 될 것임을 알았다. 내 앞에서 수줍어하던 그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신촌에 있는 채선당에서 밥을 먹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그 친구스럽다. 본인을 포장하거나 멋들어지게 내숭을 떨 줄 모르는 J였다. 눈은 너무나도 맑아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기가 어려웠다. 때로는 그 투명한 눈이 두렵기까지 했다. 그래도 서로가 마음이 있던 것이 처음이었던 만큼 나는 내가 이렇게까지 사랑에 미칠 수 있는 사람이란 것을 몰랐다.
그렇다. 나는 6개월 동안 사랑에 미쳐있었다. 눈이 휙 돌아서 그가 아니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 모든 시간은 그를 위주로 흘러가고 나는 나 스스로를 기꺼이 망가뜨렸다. 나를 태워가며 그를 사랑했지만 놀랍게도 지치지 않았다. 사랑이 깊어갈수록 슬퍼지긴 했지만 말이다.
"J는 발에 땅을 붙이고 눈은 하늘을 보는 사람이야"라고 주선자는 말했다. 그가 맞았다. 반면에 나는 하늘을 보며 날고 있는 사람이었다. 바다를 향해 날갯짓 치는 나비였을지, 불을 향해 몸을 던지는 불나방이었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는 이 세상 무엇보다 그를 사랑했다. 그의 노력을 사랑했고, 그의 커리어를 사랑했다. 그의 사랑 목록에는 분명 내가 있었지만 저 아래 어딘가였다. 분명 방학에는 내가 3순위 정도 돼보였는데 학기가 시작하자마자 나는 8순위 정도로 떨어져 있었다. 시험기간에는 말하더라. 한 달 정도 준비해야 하니 시험 끝나고 보자고. 머리가 띵했다. 대학교 중간고사를 한 달이나 준비하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단 말인가. 사랑에 미쳐있던 나는 그와 같이 공부하겠다는 소리를 했고 그렇게 우리 관계는 파국으로 달려 나갔다.
다시 말하지만 두 번째 연애였으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하는 첫 번째 연애였다. 가슴이 그만을 위해 뛰고 내 지구는 그를 위해서만 자전했다. 밥 먹고 벚꽃 보러 가자, 여기도 잠깐 놀러 가자 하는 말들이 그에게는 스트레스가 됐고 결국에 그는 중간고사 즈음에 나에게 이별을 고했다. 뭐랬더라. "너랑 있는 시간에 이제는 내가 어떤 공부를 더 해야 할지만 생각나." 그래,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나는 "못 들은 척할 테니까 우리 평소대로 지내면 안 될까?"라고 했다. 그는 수화기 너머로 나를 따라 울었다.
내 세상이 뒤집히고 가슴이 으깨지는 고통이었다. 살면서 경험해보지 못한 고통이랄까. 내 온몸의 세포가 이 사실을 부인하는 듯했다. 나는 잘 가지도 않는 교회에 엄마를 따라나서고 영혼 없는 미소로 사람들의 인사를 받은 뒤 집에 가서 이슬의 톡톡 한 병을 비우고 잤다. 나는 절대 혼술을 하지 않는다. 아마 이때가 내 첫 번째 혼술이었던 것 같다. 이별의 밤에 잠을 한 숨도 자지 못해서 이슬의 톡톡 힘을 빌려 강제로 이 사실을 잊어야만 했다.
그리고 중국어 학원을 갔던 그날 저녁, 나는 학원에서 결심을 하나 하게 된다. 아, 이 문을 박차고 나가 그를 잡아야겠다. 내 인생에는 그가 없으면 안 되겠다. 그렇게 학원을 마치고 집과는 반대방향으로 틀어 그의 자취방 앞에서 그를 불렀다. 지금 생각하면 쿨하지도 못하고 더럽게 질척거렸다. 우리가 즐겨 먹던 따뜻한 베지밀 하나를 사서 그에게 줬다. 그를 보고 준비했던 말을 하려 했는데 눈물이 목구멍까지 차올라서 도저히 못하겠더라. 그래서 뒤를 돌아달라 말하고 그의 흰 후디 옷자락을 뒤에서 잡으며 한 번만 기회를 다시 달라 빌었다. 앞으로 너의 공부 시간을 존중하고 절대 방해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공부보다 못한 사람이 되겠다 나를 낮췄다.
그렇게 자발적인 재앙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