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연애부터 롱디, 유학 중 이별까지
나 혼자 옷자락을 잡고 있는 사랑이어도 괴로움보다는 안심이 컸다.
나를 있는 힘껏 낮추고 몸을 수그리고 있어도 J의 옷깃을 잡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밤에 잠을 설치지 않을 수 있었다. 아마 바쁜 것만 끝나면 그가 다시 나를 봐줄 것이란 희망이 저기 어딘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본격적인 절망의 두 달이 시작됐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그런 일은 없었다. 그는 예전처럼 나를 바라봐주지도 안아주지도 시간을 내주지도 않았다. 마치 내가 알아서 떨어져 나가길 기다리는 사람처럼. 간혹 가다 본인의 옷깃을 훠이훠이 털 때도 있었다.
내 인생에서 최고로 비참한 순간이었다. 나를 그렇게 낮추고 눌러도 더 낮은 바닥은 있었다. 이때는 친구도 없었다. 다들 교환학생에 인턴에 해외생활에 바쁜 시기였고 남자 동기들은 군대에 있었기에 내가 막학기를 하고 있을 무렵 학교에 내 친구들은 아무도 없었다. 아, 한 명 있었으나 내 연애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J는 이제 본인과 본인의 학업과 본인의 친구들, 과생활 뒷자리에 나를 두기 시작했다.
나를 한 없이 낮추니 그도 나를 한 없이 뒤로 보내더라.
하루는 수업 다 끝나고 그의 일정이 끝나기를 밤까지 학교에서 기다렸지만 그는 피곤하다며 나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고 나는 인생에서 처음 경험하는 비참함을 맛봤다. 짝사랑도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는데. 상대가 나를 좋아하는 않는 것을 떠나 귀찮아까지 한다면 그래도 여자친구 타이틀을 쥐고 있는 입장에서는 박탈감이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를 위해 헤어져줘야겠구나라고 이번에도 J를 너무나도 사랑했던 나는 그의 입장에서 나를 바라봤다.
그다음 이야기는 꽤나 심플하다. 그는 기말고사가 끝나는 날 나를 찼다. 영화 뭐 볼까 고민하며 옷도 예쁘게 입었건만 녹음이 시작되는 6월에 나는 두 번째로 차였다. 중간고사 때 차더니 기말고사 때 또 차였다. 내 대학생활 마지막 학기였는데 꽤나 화려하게 막이 내렸다. 나는 역시나 또 울었다. 그러나 슬픔의 울음보다는 내가 가엾고 내가 견뎌온 시간들이 안쓰러워서 울었다. 물론 붙잡은 것도 나고 감내하기로 한 것도 나지만 이런 취급을 받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먼저 가겠다 하고 일어난 뒤 화장실에서 한참을 더 울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내 고등학교 친구가 저녁을 나와 함께 보내줬다.
다음 날이 되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연애 중에는 하루에도 몇십 번 하늘이 무너지는 나였는데 마지막으로 차이고 나니 너무나 후련한 것이다. 엄마랑 장도 보러 가고 잠도 잘 잤다. 최선을 다하니 미련도 없었다. 언젠가는 불타는 사랑이 꼭 하고 싶었는데 소원을 이룬 셈이다. 나를 불사 질러가며 다른 이를 사랑했다. 월수금 J를 만났다면 화목은 버리는 하루로 쳤던 때도 있었다. 아 그래도 내 마음이 그렇게 연소가 다 됐나 보다. 바로 깔끔하게 재까지 다 타버린 나는 남기는 것 하나 없이 그를 날려 보냈다.
이제는 더 이상 나를 태우는 연애는 하지 않으리.
세 번째 연애는 생각보다 금방이었다. H랑은 J랑 헤어진 지 6개월 만에 만나 무려 5년을 연애했다. 그만큼 잘 맞았고 서로 많이 사랑했다. 아니, 솔직히 잘 맞는 편은 아니었다. 다만 서로 너무 바빴고, 그는 나에게 잘 맞춰줬다. 우리는 대외활동에서 만났다. 만약에 소개팅이나 동아리, 직장에서 만났다면 우리는 친구로도 남지 않았을 거다. 그만큼 성격이 반대였다. 나는 조용하게 착하고 공부 열심히 하는 성실한 애들 무리에서 서식하는 부엉이였고 그는 모두의 주목을 한 몸에 받으며 그게 호감이든 비호감이든 신경 쓰지 않는 들판의 곰이었다. 그만큼 활동하는 공간과 시간이 극적으로 다른 우리였다. 그러나 그런 우리가 우연히 옆자리에 앉아서 반강제로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은 분명 운명의 장난이었을 것이다.
나는 파리에서 교환학생을 하던 시절 유럽 16개국 정도를 돌았다. 그만큼 여행에 진심이었다. 그중에서도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아주 작은 도시고 반나절도 안 머물렀던 곳인데 이상하게 내 마음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가 네덜란드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 하더라. 내 입장에서는 관심이 절로 가는 단어 모음집이었다. '네덜란드' 그리고 '유학'. 생각만 해도 가슴이 절로 뛰는 단어들의 합작이란.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얘기했고 그렇게 우리 둘의 자리는 지정좌석처럼 굳어졌다.
H와의 연애는 롱디, 즉 장기연애를 빼면 말할 수 없겠다. 그렇다, 그는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고도 나는 그와 연애를 하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두 번째 기적이었다. 이번에는 나 스스로를 지키면서 연애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사실 초반에는 H가 그렇게 많이 좋은 건 아니었다. 잘 안 맞는 점도 많았고 그만큼 많이 싸웠다. 그리고 곧 그의 유학과 나의 취준을 기점으로 헤어질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기에 조금은 부담 없이 그를 만나야겠다 생각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인연은 언제나 그렇듯 예상과 같은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