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습니다. 제가 바로 그 은행 퇴사자입니다.
애초에 은행원이 될 것이란 생각을 못했다.
'은행'하면 금융업보다 나무를 먼저 생각하던 나였다. 고고학자, 선생님, 외교관, 기자 등은 꿈꿔본 적 있지만, 은행원? 관심도 없었다. 이래서 인생은 닥치기 전에 모른다고 하나 보다. 2018년에 입사했으니 무려 5년 전이지만 그때도 꽤나 취업시장이 불안정했다. 스카이 나온 스펙 빵빵한 친구들도 낙방하기 일쑤였으니 수상경력 하나 없는 나는 말해봤자 입만 아프다.
일단 공고 뜬 것들 중 내가 넣을 수 있는 건 싹 다 넣어봤다. 2017년 하반기 첫 취준 때는 30개 정도, 2018년 상반기 취준 때는 40개 정도 넣었다. 연애도 하고 놀러도 다니면서 취업준비도 하고 지금 생각하면 참 열심히 살았다. 역시 사람은 의지가 있으면 어떻게든 하나보다. 취준 당시 인적성과 면접스터디 장소에 나를 꾸준히 데리러 온 그분께 감사할 따름이다.
첫 취준 때 정말 준비도 없이 뛰어들었다. 뭐, 다들 처음은 그랬으려나? 그래서인지 그때 쓴 내 자소서를 보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온다. '저는 우주먼지입니다' 였었나. 나 같아도 안 뽑았겠다. 그러나 나는 대학교 타이틀 및 학점 버프를 받아 면접까지 몇 개 올라갔고 그중에 최종면접까지 간 게 은행이었다. 최종 면접 때 다들 그 은행 색깔에 맞춰 타이를 메고 왔더라. 여자 면접자는 몇 명 없었다. 그중 한 면접관이 비대면 은행에 대비해 맞설 수 있는 대비책을 말해보라 했고, 은행에 '은'자도 몰랐던 나는 카카오뱅크처럼 귀여운 캐릭터가 없어서 그러니 캐릭터 개발 및 디자인 사업에 힘써야 한다 얘기했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긴 한데 면접에서 할 법한 얘기는 아니었다. 20대 학생들은 춘식이나 포켓몬 캐릭터 귀엽단 이유로 카드도 새로 발급받고 그러니 말이다. 그러나 면접관은 아마 ㅇㅇ 펀드나 비대면 ㅁㅁ 서비스의 확장 같은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을까? 역시 볼 것도 없이 탈락이었다.
두 번째 취준은 그래서 은행을 위주로 넣었다. 은행에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가 잘 먹히는 것 같아 그랬다. 역시나 삼성 현대 엘지 같은 대기업은 인적성 등에서 줄줄이 떨어지는데 이상하게 은행들만큼은 척척 붙더라. 사람 운명이란 게 그런 걸까? 아니면 인적성에 통과하는 것 보면 정말 기업별 인재상이 따로 있나 보다. 은행은 나처럼 유순하고 잘 웃고 나긋나긋한 사람을 원하는 거지. 사실 나중에 또 자세히 얘기할 부분이긴 한데 정말 은행 동기들 하나같이 유순하고 잘 웃고 나긋나긋하다. 이게 은행의 큰 그림이다. 진상들이 판치는 은행에서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를 실현시키거나 반대로 '고객은 왕이다'를 참 명제로 만들어내겠다는 은행의 정교한 플랜.
면접은 1차 면접과 최종면접으로 나눠졌다. 1차 면접은 원데이 면접으로 연수원에 가서 영업면접, 개인면접, 그룹토론까지 해야 했다. 정말 대기시간까지 합쳐서 하루종일 걸렸다. 셋 다 떨지 않고 평균 이상으로 했고 특히나 그룹토론은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단련했기 때문에 쉽게 넘어갔다. 그다음은 최종면접이었다. 내가 맨 첫 타자로 앉아있었는데 거의 모든 질문에 처음으로 답을 해야 했다. 내가 솔직히 모른다고 한 질문은 나머지 넷도 모른다고 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질문. 악연이 시작된 시점이다. 나중에 나를 괴롭힌 K 직원의 아버지였고 추후 행장이 된 그... 그는 나의 포부를 듣더니 "자꾸 글로벌, 글로벌하는데 방금 말한 거 영어로 해봐요, "라고 말했고 나는 사실 기다려온 기회라 놓치지 않고 자신 있게 뱉어냈다. 다시 생각해 보면 그가 날 한 방 먹이려 했는데 내가 블로킹을 제대로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파란 은행의 직원이 되었고 합격 일주일 후부터 연수원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