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 발아
그녀는 언제부터인가 멈춰 있었다. 바람이 스쳐도, 땅속에서 무언가 꿈틀대도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면 소리가 나고, 소리는 기억을 흔든다. 기억은 살을 뚫고 피어나기에.
처음, 등이 갈라졌을 때 그녀는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오래된 숨처럼 느껴졌다. 척추를 따라 미세한 진동이 시작되었다. 톱밥이 쌓이는 소리, 혹은 모래시계가 뒤집히는 소리. 피부 아래에서 나무가 솟았다. 살아 있는 나무였지만 뿌리를 내리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등뼈를 축 삼아 나선형으로 감아 올랐다.
가지가 늘어날수록 그녀의 무게중심이 뒤로 쏠렸다. 걸을 때마다 새로운 균형을 찾아야 했다. 어깨가 뒤로 당겨졌고, 고개는 자연스럽게 앞을 향했다. 돌아볼 수 없는 자세로 굳어갔다.
나무는 오직 보이지 않는 곳에서만 자라나는 법이었다.
여섯 살 여름의 첫 번째 조각: "네가 돌아보면 내가 알아볼게." 소년이 말했다.
"뭘?"
"네 등에서 자라는 걸."
가지들은 서로를 감으며 올라갔다. 끝마다 얇은 막으로 싸인 눈(芽)이 맺혔다. 아직 열리지 않은 가능성들. 그리고 첫 번째 가지의 상처에서 꿀이 흘렀다. 처음엔 투명했다. 하지만 공기에 닿자 호박색으로 변했다. 체온보다 뜨거운 시간.
꿀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땅이 다르게 대답했다. 첫 방울은 침묵을, 두 번째는 메아리를, 세 번째는 작은 떨림을 낳았다.
첫눈이 내린 밤, 나무는 처음으로 소리를 냈다. 대나무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와 닮은, 그러나 더 낮고 깊은 울림.
二. 만남
나무가 자라기 시작한 지 여덟 달째 되던 겨울, 한 사내가 그녀 앞에 섰다.
그는 화환을 들고 있었다. 세 번 꼬아 엮은, 그녀가 어릴 적 만들던 것과 똑같은 방식의 화환. 하지만 풀이 아니라 마른 나뭇가지로 엮은 것이었다.
"너구나." 그가 말했다.
그녀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스무 해가 흐른 얼굴. 하지만 그의 손목에 난 흉터를 보는 순간, 알았다. 새 발톱 같은, 혹은 날카로운 껍질에 베인 자국.
"너였구나." 그녀가 대답했다.
그의 어깨가 이상하게 구부러져 있었다. 마치 무거운 것을 지고 있는 듯한,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등 뒤. 그가 돌아설 때, 그의 재킷 뒤쪽이 불규칙하게 튀어나온 것이 보였다. 무언가가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가지에서 떨어진 꿀 조각을 집어 들었다. 햇빛에 비춰보더니 입에 넣었다.
"쓰다. 그런데 삼키기 전에는 달았어."
여섯 살 여름의 두 번째 조각: 풀숲에 무언가 반짝이고 있었다. 다가가자 하얀 껍질이 보였다. 이미 깨져 있었다. 알. 아니면 씨앗. 손바닥보다 작고, 주먹보다 컸다.
껍질 안쪽에 투명한 점액이 남아 있었다. 미세한 섬유질이 떠다녔다. 맥박처럼 떨렸지만, 호흡처럼 퍼져나갔다.
그들은 그것을 나눠 마셨다. 쓰면서도 달았다. 소녀는 등이 따뜻해지는 것을, 소년은 등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내 등에는," 그가 조용히 말했다. "돌이 자라고 있어. 정확히는 수정. 안쪽으로만 자라서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그녀는 그제야 나무의 무게를 느꼈다. 바깥으로 뻗어나가는 생명과 안으로 파고드는 광물. 그들의 등은 서로 다른 성질이 자라나는 경계였다.
"네가 돌아서던 날, 나는 정말로 봤어. 네 등에서 초록빛이 번지는 걸."
그는 화환을 내려놓았다. 마른 가지들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사실 나도 그날부터였어. 등이 간지럽기 시작한 게."
三. 변화
봄이 왔다. 나무의 눈들이 부풀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그림자를 유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아침의 그림자는 길고 가늘었고, 정오의 그림자는 그녀의 발 아래 복잡한 만다라를 그렸다. 해 질 녘, 그림자는 거대한 날개처럼 펼쳐졌다.
등에서 새로운 소리가 났다. 목관악기 같은, 바람이 구멍을 통과하는 소리. 나무에 공동(空洞)이 생긴 것이다. 그 안에서 꿀이 고이고 있었다. 거품이 일기 시작했다. 발효되는 것인지, 아니면 숨을 쉬는 것인지.
어느 날 아침, 그녀는 결심했다. 등을 만져보기로. 손끝이 나무에 닿았을 때, 그것은 따뜻했다. 체온과 같은 온도. 그리고 맥박이 뛰고 있었다. 그녀의 심장 박동과 정확히 엇갈리는 리듬으로.
사내가 다시 왔다. 이번에는 등이 더 굽어 있었다. 걸음걸이도 조심스러웠다. 마치 깨지기 쉬운 무언가를 안고 있는 사람처럼.
"수정이 폐를 향해 자라고 있어." 그가 말했다.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의사 말로는 숨 쉴 때마다 빛이 난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나무가 함께 숨을 쉬었다. 꿀이 흔들렸다.
"아프지 않아?" 그녀가 물었다.
"아파. 네 나무는?"
"무거워. 하지만..." 그녀는 문장을 끝내지 못했다. 무겁지만 없어지면 안 될 것 같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을 짓누르는 것을 사랑하게 된다는 게 얼마나 기이한 일인지.
"하지만...?"
"이제 내 일부 같아. 떼어내면 나도 죽을 것 같아."
사내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나도 같은 생각을 했어. 수정을 꺼내면, 내 안의 뭔가도 함께 사라질 것 같다고."
그는 잠시 침묵했다.
"우리가 묻은 게 알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씨앗이었을지도."
그녀의 나무에서 첫 번째 눈이 터졌다. 안에는 또 다른 눈이 있었다. 더 작고, 더 단단한.
四. 순환
여름이 깊어갔다. 나무는 이제 그녀 키를 넘어섰다.
꿀이 진하게 농축되기 시작했다. 호박색에서 짙은 갈색으로, 그리고 검은색에 가까운 적갈색으로. 그 안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작은 벌레도 아니고, 포자도 아닌. 그것은 기억 그 자체였다.
여섯 살 여름의 세 번째 조각: "묻어줄까?" 소년이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땅을 팠다. 조심스럽게 빈 껍질을 내려놓으려는 순간, 소년의 손목이 깨진 껍질에 베었다. 피가 흙에 떨어졌다.
그리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등을 보이며.
여름 끝 무렵, 사내가 왔다. 그는 이제 완전히 구부정했다. 하지만 표정은 평온했다.
"내일 수술이야." 그가 말했다. "수정을 꺼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고개를 돌리려 했다. 목이 조금 움직였다. 나무가 따라 움직였다. 그녀의 시선이 닿을 수 있는 각도가 넓어졌다.
"네 등이 보여." 그녀가 말했다.
그는 웃었다. "나도 네 나무가 보여. 아름답다."
五. 미완의 봄
수술 소식은 듣지 못했다.
그녀는 매일 나무의 꿀을 들여다보았다. 혹시 그 안에 사내의 소식이 비칠까 싶어서. 그의 모습도, 수정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여섯 살 여름의 그들만 반복해서 떠올랐다. 땅을 파는 작은 손들. 흰 껍질. 맥박치는 점액.
그해 겨울은 유난히 길었다.
그녀의 나무에 변화가 일어났다. 꿀이 완전히 굳어 수지가 되었다. 그 안에 갇힌 것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여섯 살의 여름, 열두 살의 가을, 스무 살의 겨울.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계절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45도, 그리고 90도. 목이 아팠지만 계속 돌렸다. 110도에서 나무의 그림자가 아닌 자신의 그림자를 보았다. 135도에서 나무의 가장 낮은 가지를 보았다.
180도.
그녀는 자신의 등을 보았다. 정확히는 등에서 자란 나무를 보았다. 그것은 나무인 동시에 그녀 자신이었다. 경계는 없었다. 피부에서 껍질로, 살에서 목질부로 이어지는 연속체.
나무의 가장 높은 가지에 마지막 눈이 있었다. 그것이 터지기 시작했다. 안에서 나온 것은 꽃도 잎도 아니었다.
작은 손이었다. 여섯 살 아이의 손 크기. 손바닥에는 씨앗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씨앗을 받았다. 차갑고도 뜨거웠다. 죽어 있으면서 살아 있었다.
멀리서 발소리가 들렸다. 절뚝거리지 않는, 가벼운 발소리. 그녀는 숨을 멈췄다.
사내가 나타났다. 그의 등은 곧았다. 재킷 아래로 드러난 목덜미가 자연스러웠다.
"수술은..." 그녀가 물으려 했지만 그가 먼저 말했다.
"성공했어. 수정을 꺼냈어."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천 주머니를 꺼냈다. "이거야. 내 등에서 자란 것."
그가 주머니를 열었다. 안에는 육각형 수정 조각들이 들어 있었다. 햇빛에 비추자 무지갯빛이 났다.
그녀는 수정 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손가락 마디만 한 크기. 투명하지만 안쪽에 붉은 점이 박혀 있었다.
"피야." 사내가 말했다. "내 피가 굳은 거."
여섯 살 여름의 네 번째 조각: 그들이 점액을 나눠 마신 후, 소년이 손가락으로 땅에 뭔가를 그렸다. 당시엔 그냥 낙서였다. 지금 생각하면, 나무 같기도 하고 결정 같기도 한.
"이게 뭐야?" 그녀가 물었다.
"우리." 소년이 대답했다.
"이제 네 차례야." 사내가 말했다.
그녀는 손 안의 씨앗을 들여다보았다. 표면에 미세한 균열이 있었다. 그 틈으로 아주 작은 뿌리가 나오려 하고 있었다. 초록과 투명 사이의 색.
봄은 아직 오지 않았다. 더 이상 기다리는 계절도 아니었다.
그들은 나란히 서서 땅을 바라보았다. 두 개의 그림자가 겹쳤다. 그 교차점에, 씨앗을 심을 자리가 있었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땅을 팠다. 사내도 함께 무릎을 꿇었다. 두 사람의 손이 흙 속에서 스쳤다. 나무 진과 수정 가루가 섞였다.
씨앗을 땅에 내려놓는 순간, 그녀의 나무에서 마지막 꿀 한 방울이 떨어졌다. 씨앗 바로 옆에. 사내가 수정 조각 하나를 꺼내 함께 묻었다.
"이번엔, 우리 둘 다 볼 수 있겠지." 그녀가 말했다.
"자라는 걸?" 그가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너머까지."
바람이 불었다. 나무가 노래했다.
두 사람의 그림자 속에서, 씨앗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땅속에서, 작은 뿌리가 뻗기 시작했다.
수지 속 시간들이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