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대의 피아노 (1)

by Velinas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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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언덕의 집


8월의 햇살이 창문을 뚫고 쏟아졌다. 혜진은 핸들을 단단히 잡은 채, 언덕길을 올랐다. 도시를 벗어난 지 두 시간이 넘었다. 고층 빌딩은 사라지고, 들판이 펼쳐지더니 이내 나무들이 도로 양옆을 감쌌다. 바람은 창문 틈으로 스며들며 얼굴을 스쳤다.

조수석에 놓인 휴대폰 화면을 다시 확인했다.
“피아노 조율 해줄 수 있어? 급해. 지금 와줄 수 있어?”
3주 만에 온 준서의 연락이었다.

그녀의 기억은 오래전으로 흘러갔다. 음대 3층 복도. 오전 10시 무렵, 지나가던 발걸음을 멈추게 한 쇼팽의 에튀드 Op.25 No.11. 12번 연습실에서 흘러나오던 그 소리는 준서의 것이었다. 같은 구절이 반복되고 있었다. 멈췄다가, 다시. 문을 두드리려다 그녀는 조용히 돌아섰다.

점심시간, 다시 그 문 앞에 섰다. 여전히 같은 곡. 이번엔 문을 열었다.
“준서야.”
그가 고개를 돌렸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들러붙어 있었다.
“어, 혜진아.”
“점심 먹으러 가자.”
“조금만 기다려줄 수 있어?”
혜진은 시계를 보았다. “그럼 1시에 올게.”

1시. 다시 문을 열었을 때, 그는 여전히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야.”
준서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벌써?”
시계를 보며 멋쩍게 웃었다. “진짜네. 시간 가는 줄 몰랐어.”

그로부터 몇 년 후, 쇼팽 콩쿠르 결승. 준서가 먼저 무대에 올랐다. 발라드 1번. 호로비츠를 떠올리게 하는 연주였다. 극단적인 다이내믹, 독창적인 해석, 초인적인 기교. 박수가 터졌다. 혜진은 무대 뒤에서 손을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차례. 같은 곡. 중간에서 손목이 삐걱거렸다. 만성 건초염이 또다시 그녀를 덮쳤다.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음을 놓쳤다. 관객들이 숨을 죽였다. 가슴이 요동쳤다. 숨이 가빠졌다. 손가락은 계속 움직였지만, 피아노 소리는 멀어지고 심장 소리만 가까워졌다. 쿵쿵. 쿵쿵.

무대를 내려올 때, 다리가 후들거렸다.

준서는 2위. 혜진은 5위였다.

콩쿠르 이후, 두 사람에게는 공연 요청이 쏟아졌다. 가끔은 듀오 무대도 함께 올랐다. 준서는 음반 계약을 맺고 국내외를 오가며 바쁘게 활동했다. 혜진은 4년 후, 손목 재활을 위해 연주를 멈췄다. 5개월 만에 어느 정도 회복되었고, 복귀를 준비하던 중 계단에서 넘어졌다. 손목을 짚었다. 응급실. 인대 손상. 절망적이었다. 다시 피아노를 칠 수 있을까. 회복이 시작될 무렵, 그녀는 조율사 자격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6년 전, 마침내 무대에 복귀했다. 첫 곡은 모차르트 소나타 K.545. 통증은 견딜 만했다. 두 번째 곡, 쇼팽의 녹턴. 손목이 욱신거렸다. 세 번째 곡, 리스트의 헝가리 광시곡. 중간에 손이 떨렸다. 음을 놓쳤다. 또. 청중의 시선이 따가웠다. 가슴이 뛰었다. 6년 전 그날처럼.

그 후 몇 번 더 무대에 섰지만, 결과는 같았다. 실수. 통증. 두려움. 무대 공포증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사람들을 피했다. 연락도 끊었다.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 3년 전 그녀는 조율사가 되었다.


민수의 작업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민수는 오래된 야마하 그랜드 피아노를 조율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 혜진이구나. 앉아.”
그녀는 옆 의자에 앉아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망치를 돌리는 각도. 빠르고 정확했다.

“독일에서 피아노 전공하셨다고 했죠?”
“응. 하노버에서.”
“근데 피아니스트는 내 길이 아닌 것 같더라.”
손은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였다.
“그래서 조율사 자격증을 땄어. 이게 나한텐 더 맞더라고.”
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묻지 않았다.

어느 날, 민수가 맥주를 마시며 말을 꺼냈다.
“뮌헨에 있을 때 특이한 피아노를 본 적 있어.”
“어떤 건데요?”
“건반이 88개가 아니라, 49개랑 39개로 나뉘어 있었어.”
혜진은 젓가락을 멈췄다. “그게... 가능해요?”
“나도 놀랐지. 한 수집가 집에서 봤어.”
“소리는요?”
“쳐보진 못했어. 주인이 손대지 말라고 했거든.”
민수가 잔을 비웠다.
“조율하면 안 되는 피아노라고 하더라. 조율사들이 여러 명 왔는데, 전부 문제가 생겼대.”
“무슨 문제요?”
“자세히는 말 안 해줬어. 그냥... 이상한 일들이 있었다고만.”
“지금도 그 집에 있을까요?”
“모르지. 벌써 20년 전 일이니까.”

1년 전, 콘서트홀의 조율실. 혜진은 해머의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복도에서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왔다. 쇼팽 발라드. 터치가 익숙했다. 그녀는 망치를 내려놓고 복도로 나갔다. 무대 한쪽에 서서 바라보았다. 준서였다. 6년 만의 재회였다.

연주가 끝나고 그가 무대를 내려왔다.
“오, 혜진아?”
“…준서야.”
“여기서 뭐 해?”
“나, 조율사 됐어.”
그의 눈이 커졌다. “조율사?”
“응.”
“그럼… 피아노는?”
“그만뒀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미안해. 그동안 연락 못해서.”
준서가 고개를 저었다. “에이, 아냐. 네가 사정이 있었겠지. 커피 한잔 할까?”
“그래.”

그날 이후, 둘은 다시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처음엔 조금 어색했지만, 금세 예전처럼 편해졌다.

4개월 전, 준서가 말했다.
“이사했어. 도시 외곽. 정말 조용한 곳이야.”
“좋겠다.”
“특별한 피아노가 있어. 88 건반을 둘로 나눈 거야.”
혜진의 손이 멈췄다. “뭐라고?”
“신기하지? 49개 하고 39개. 한쪽을 치면 다른 쪽도 울려.”
“…그게 정말 있어?”
“응. 소리가 환상적이야. 마음을 건드리는 영혼의 숨결 같달까? 하하.”
“대체 어떻길래?”
“놀러 와. 와서 들어. 같이 연주하자.”

그 후에도 준서는 종종 혜진에게 물었다.
“많이 바빠? 언제쯤 올 수 있어?”

혜진은 답장을 보냈다.
“다음 주말 어때?”
답이 없었다.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무슨 일 있어?”
읽음 표시도 뜨지 않았다.

일주일이 흘렀다. 그리고 아무 소식 없이 또 일주일.
준서의 매니저에게 연락했다.
“저도 연락이 안 돼요. 해외 투어도 갑자기 취소하셨어요.”
대학 동기에게도 물었다.
“나도 최근에 못 봤어.”

다시 일주일이 지나고, 문자가 도착했다.
“피아노 조율 해줄 수 있어? 급해. 지금 와줄 수 있어?”

혜진은 민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왜?”
“뮌헨에서 봤다던 피아노요. 88 건반을 나눈 거.”
“응.”
“제 친구가 그걸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혹시 조율 의뢰받았어?”
“네.”
민수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 피아노... 가지 마. 그건 조율하면 안 되는 악기야.”
“소리가 환상적이래요. 선생님도 궁금하지 않으세요?”
“궁금하지. 하지만 그 피아노는 위험해. 내가 말했잖아. 조율사들이 다쳤다고. 너까지 그런 일에 휘말리는 건 보고 싶지 않아.”
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혜진아.”
“네.”
“약속해. 가지 않는다고.”
혜진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이 길 위에 있었다.

언덕은 점점 가팔라졌고, 나무들은 더 빽빽해졌다. 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래된 건물. 담쟁이덩굴이 벽을 뒤덮고 있었다. 정원은 황폐했다. 잡초가 무성했고, 장미 덤불은 엉켜 있었다. 집은 외로워 보였다. 세상에서 잊힌 것처럼.

차를 세웠다. 시동을 끄자, 새소리만 남았다.

가방을 들었다. 조율 도구들. 망치, 쐐기, 펠트, 튜너. 3년간 손에 익은 무게.

문 앞에 섰다. 초인종을 눌렀다.

발소리가 다가왔다. 느리고, 불규칙했다.

문이 열렸다.

준서가 서 있었다.

혜진은 숨을 멈췄다. 그는 장갑을 끼고 있었다. 8월의 더위 속에서,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다크서클은 깊었다. 체중이 많이 빠진 듯했다.

“들어와.”

그는 시선을 내리깔고 옆으로 비켜섰다.

혜진은 안으로 들어섰다. 거실 한가운데, 스타인웨이 그랜드가 놓여 있었다. 검은 칠이 빛났다. 건반을 세었다. 49개.

뚜껑을 열었다. 현은 지나치게 깨끗했다. 매일 닦는 듯했다. 건반 하나를 눌렀다. C4.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공기가 진동으로 물들었다. 천장의 샹들리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가슴팍에서 울림이 느껴졌다.

혜진은 수백 대의 피아노를 조율해 왔다. 콘서트홀의 스타인웨이도, 음대의 야마하도, 개인 레슨실의 베히슈타인도. 하지만 이런 소리는 처음이었다.

“나머지는?” 그녀가 물었다.

준서가 계단을 가리켰다. “위에.”

2층 복도 끝의 방. 문을 열자 또 다른 스타인웨이가 있었다. 39개 건반. C5부터 C8까지. 가장 왼쪽 건반을 눌렀다. C5.

아래층에서 똑같은 음이 울렸다.

다시 눌렀다. C6. 아래층에서 C6. C7. 아래층에서 C7.

혜진은 벽을 두드렸다. 바닥을 살폈다. 전선도, 진동판도, 어떤 물리적 연결도 없었다.

민수가 말했던 그 피아노. 정말 있었다.

계단을 내려와 거실로 돌아왔다. 준서가 피아노 옆에 서 있었다.

“준서야.” 혜진이 말했다. “그 장갑 좀 벗어봐.”

준서가 고개를 저었다.

“부탁이야.”

그는 망설이다가 장갑을 벗었다.

혜진은 숨을 삼키며 뒤로 물러섰다.

손이 아니었다. 건반이었다. 희고 검은 패턴. 중지와 약지 사이에 검은 부분이 있었다. 검은 건반처럼. 피부는 나뭇결처럼 단단하고, 검게 칠해진 듯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야?”
“3주 전.”

준서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조율을 시도했어. 음정이 안 맞아서.”

그는 손을 들어 보였다.

“멈췄어. 무서워서. 근데…”

자신의 가슴을 쳤다. 둔탁한 소리. 피아노 몸통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몸속에서 계속 울려. 틀어진 음들이. 불협화음으로. 3주 동안 잠을 못 잤어. 미쳐가고 있어.”

준서가 혜진을 바라보았다.

“완성하고 싶어. 끝내고 싶어.”




다음 이야기 ⌜1897년의 저주⌟는 11월 1일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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