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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lopenspirits Mar 26. 2024

더 이상 설레지 않는 물건들

휴직 83일 차

     작년에 뭐 입고 다녔지? 는 언제나 여자들의 난제다. 옷이 없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매번 옷장을 정리할 때마다 버릴 옷들이 한아름씩 나온다. 옷은 필요보다는 욕심 때문에 사게 되는 것 같다. 쇼핑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나는 비싸고 좋은 물건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물건, 한 번도 가진 적이 없는 물건을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안 입는 옷이 한아름 나왔다. 계절마다 나와 함께 갈 수 없는 옷들은 보통 아름다운 나라에 기부를 한다. 당근에 팔 수도 있지만 하나씩 사진을 찍어 올리기도 귀찮고, 또 팔릴 때까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부담되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 아름다운 가게는 10시 반 오픈이다. 11시에 병원예약이 있었고, 병원 가는 길에 가게가 있었기 때문에 조금 일찍 나서 아름다운 가게에 들렀다. 도착시간은 10시 25분. 5분을 그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3~4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나와 함께 문 앞에서 오픈을 기다렸다. 굳이 중고 물품을 오픈런을 해서까지 사는 게 신기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다들 바구니를 하나씩 들고 쇼핑을 하기 시작했지만, 나는 가져온 쇼핑백을 들고 멀뚱멀뚱 댔더니 직원이 먼저 기부하러 오셨어요?라고 물어봤다.


     큐알을 찍고, 회원번호를 입력했다. 이번이 네 번째 기부라고 떴다. 큰 종이 쇼핑백에 마구잡이로 집어넣어서 뭘 얼마나 들고 온 지 몰랐는데 세어보니 옷 9벌과 가방 1개였다. 사실 그것들 말고도 안 쓰는 물건, 안 입는 옷, 안 신는 신발이 아직 많다. 특히 구두들은 이제 보내줘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예전에는 10센티가 넘는 구두들을 신고 잘도 돌아다녔다. 지금은 하이힐 유행이 지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잘 신지 않는다. 누가 차로 집 코 앞까지 픽드롭을 해주지 않는 이상, 그 높은 신발을 신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건 이제는 무리다. 드레스도 마찬가지다. 십 년 전, 미쳐가지고 사모았던 DVF나 DKNY 같은 고가의 원피스들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것들을 입은 건 5년 전이었던 것 같다. 다행히 살이 많이 찌지 않아서 지금도 몸에는 맞지만, 이제 예쁘자고 불편을 감수할 인내심은 잃어버렸다. 심지어 연말 회식으로 호텔 레스토랑에 갈 때도 난 어그를 신고 갔다. 이제는 레깅스나 쇼츠, 탑과 운동화가 디폴트 복장이 되어버렸다.


     버리지 못하는 것에는 미련이 남아있다. 한 때 예뻤던, 체력이 좋았던, 속눈썹까지 붙이고 다닐 정도로 가꾸는 걸 좋아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미련. 그리고 어쩌면 가끔 특별한 날에는 그 모습을 재연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반면, 쉽게 기부해 버린 물건들에는 미련이 없었다. 안 입고, 필요 없고, 더 이상 설레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는 모든 것을 기부했다. 다행인 건 나에게는 그 물건들이 더 이상 새롭지 않지만, 누군가에게는 오픈 전에 가서 문이 열리길 기다릴 정도로 새롭고 설렘을 주는 물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내가 기부하러 가서 산, 3천 원짜리 캡모자를 길리에서 주야장천 쓰고 다녔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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