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무뎌졌던 색이 다시 살아나다

by 오늘도책한잔

체력과 육아로 미뤄두었던 그림은, 맨발 걷기를 통해 조금씩 회복된 몸과 마음 덕분에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었습니다. 산과 황톳길을 걸으며 느낀 몸의 균형과 마음의 안정이, 오래 묵혀두었던 꿈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누워 있거나 미뤄 두었던 시간들을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자라난 것이지요.
화실 문 앞에 서는 순간, 삶의 색채가 달라지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그것은 시각이 아니라 후각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 유화 냄새…”
스무 살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는 한 번도 맡아보지 못했던 향이지만, 이제는 마음속 깊은 어둠을 쓸어내리고 다독이는 힘처럼 느껴졌습니다. 사람마다 호불호가 갈리는 향이지만, 제게는 잊고 있던 시간을 되살리는 주문과도 같았습니다.
문을 열자 민성동 화가 선생님이 마대걸레로 바닥을 닦고 계셨습니다. 희고 둥근 얼굴, 따뜻한 미소로 저를 반겨 주셨습니다. 창가 쪽 자리를 안내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여기가 네 자리야. 여기 앉아 그림 그리면 돼.”
가슴속 울컥거림이 올라왔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간절히 바라던 시간, 결혼과 출산으로 멈춰야 했던 시간, 건강 문제로 멈춰야 했던 시간. 모든 간절함의 시계가 다시 ‘또각또각’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화실의 다른 작가님들에게 저를 소개하며, 마치 아이를 보호하는 보호자처럼 조심스레 품어 주셨습니다. 덕분에 그동안 짊어져야 했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온전히 제 자리에 앉아 그림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자리에 앉아 붓을 잡는 순간, 마음속에 감춰두었던 에너지가 분출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첫 그림은 화려한 꽃이었습니다. 울긋불긋 터져 나오는 색감은 단순한 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숨겨두었던 내 안의 빛을 표현하는 축제였습니다. 완벽하지 않은 형태와 미완성적 존재까지 그대로 담아내면서도 밝은 에너지를 발산했습니다. 그림을 통해 마음속 굳어 있던 색이 서서히 풀리고, 다시 살아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이 바로 회복의 순간이었습니다.
붓을 움직이는 손끝에는 오랜만의 자유가 묻어 있었습니다. 집중하며 색을 섞고, 층을 쌓아가면서 제 내면의 감정과 직면했습니다. 그림 속 꽃잎 하나하나에 제 마음의 희로애락을 담아냈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다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몸과 마음이 지쳐있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작은 세부까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색감, 질감, 붓 터치의 굴곡, 캔버스 위에서 섞이는 물감의 미묘한 차이까지, 모두가 살아 움직이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날 화실에서 돌아오는 길, 길게 뻗은 도로 위로 부드러운 햇살이 내려앉았습니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가벼웠습니다. 아이들을 품에 안고 집으로 들어서면서 느낀 행복은, 그림을 통해 자신과 다시 만나게 된 선물과 같았습니다.

함께 생각해 볼 이야기
우리는 종종 ‘엄마’, ‘아빠’라는 이름 뒤에 자신을 숨기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은 아이에게 “나도 나답게 살아도 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먼지 쌓인 꿈, 하고 싶은 일, 열정의 조각이 있다면 그것을 다시 꺼내는 것만으로도 삶은 풍성해집니다.
혹시 마음속에 묻어둔 것이 있나요? 책이든, 악기든, 운동화든, 오래전 포기한 무엇이든 좋습니다. 그것을 다시 꺼내 보는 순간, 삶의 색은 다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날을 ‘언젠가’가 아니라 ‘오늘’로 바꿀 때, 우리는 자기 자신과 아이에게 진정한 축제를 선물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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