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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호 Apr 14. 2020

화가 나는 건 내가 ‘음식 담당’ 이어서만은 아니다

나는 효자가 아니다. 결국 다시 불화의 꽃을 피우고 말았다.


우리 집에서 음식을 담당하는 사람은 나다. “처음부터 음식은 네가 맡아.”라는 식으로 역할이 부여된 건 아니었다. 브런치에도 종종 쓰듯이 생재료이던 것이 물리·화학적 변화를 거쳐 먹을 수 있는 대상으로 변화하는 과정 자체가 재밌다. 징그러워서 못 만지는 사람이 있다고도 하는 생선류나 생닭 등에도 별 거부감이 없다. 아이가 촉감놀이라도 하듯 신기해하며 만지고, 떼어낼 건 떼어내며 다듬는다. 마음이 부산스러워 다시 다잡을 필요가 있을 때 요리를 한다.

     

하지만 그렇게 요리를 시작하고 나면, 특히 어머니와 마주하면 늘 감성이 상해서 끝난다. 어쩌다 특별식을 만들 때나 명절 같이 대량의 요리를 해야 할 때는 항상 감정 다툼이 일어난다. 서로 간에 더 얘기를 해 봤자 마이너스여서 길어질 말도 없지만 감정이 터질 듯 팽팽하게 부풀어 있다.

     

제사를 담당하는 집은 아니어서 예법을 차려 장만할 일은 없지만 부침이나 전류를 워낙 좋아하는 구성원이 있어 매번 상당한 양의 음식을 한다. 내가 감정이 상하는 이유는 어머니가 나들이를 떠난 집에서 100개가 넘는 고추전 속을 넣고 있어야만 해서만은 아니다. “이번 명절에는 많이 하지 말자.”면서 시장만 가면 ‘이건 누가 좋아하니까, 이건 누가 좋아하니까. 연휴 동안 먹고살아야 하니까. 근데 엄마는 안 도와줄 거다?’라며 재료를 담는 손길이 바빠져서만도 아니다.

    


“오징어 튀김이 왜 이렇게 짜? 녹두전에 이 재료를 좀 안 넣으면 어떠니, 좀 얇게 부쳐봐, 왜 이렇게 눅눅해? 튀김옷이 이렇게 얇아서 어떡하니? 엉터리네,  매워서 oo 이는(동생) 못 먹겠다. 튀김 반죽에 카레가루는 뭣 하러 넣었어?”


“오징어가 반건조여서 물에 담가놨어도 짰어요, 녹두전엔 원래 고사리도 들어가요. 특유의 맛이 있잖아요, 여러 개를 하다 보니 반죽이 덜 펴졌네요, 오*기 튀김가루로 할 때가 튀김이 바삭하게 잘 되네요, 일식 튀김은 튀김옷을 얇게 하기도 한다는대요?, 아 그래서 맵지 않은 것도 준비했어요. 카레가루는 많이들 하는 방법이에요” 와 같은 말들을 속으로 삼킨다.      


일류 요리사는 아니지만 어련히 밥은 해 먹고 살, 못 먹을 지경으로 만들어놓지도 않은 음식들에 이런저런 요구와 잔소리들이 더해지는 것이 부아가 난다. 한 번쯤은 그냥 드시라는 말에 '그냥 하는 소리지, 그런 말도 못 하냐'는 대답이 돌아오면 당장에라도 폭발할 지경으로 감정이 끓는다. 그러면서 사고의 흐름은 '클 때도 칭찬 한 번을 안 해주시더니 오늘도 부정적 평가만 받는구나-> 섭섭하다->화가 난다->역시 나는 무가치한 사람이구나 ->그럼 그렇지 내가 또 무슨 기대를 한 건가.'라는 식으로 이어진다.


그래, 애초에 내가 요리를 하는 이유는 자기만족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요리를 하고 집안 살림 이곳저곳을 돌보는 일을 하는 이유는 집 안에서 별 볼일 없는 내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학비 정도나 겨우 스스로 해결할 뿐 공부를 한답시고 들어앉아 있는, 집안 경제에 별 보탬이 안 되는 사람. 흔들리는 정체성에 겁이 나서 어떤 식으로든 집안에 기여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시작한 일이다. 애초에 이런 마음이 있었으니 위와 같이 사고가 흐르는 것도 자격지심이 아니냐는 말에 변명할 여지도 없다.




이 같은 일이 일어나고 나면 더욱 가족에게 깊은 애정이 있고, 부모님께 애틋한 마음과 지극한 존경심을 표하는 이들이 부럽다. 그런 효성스런 마음에 시기가 날 정도이다. 쓰다 말고 마무리 짓지 못한 브런치글에도 있는 내용이지만 화목하고 다정한 가정이 매스컴을 통해 보도될 때는 질투가 난다. '어머니'라고 소재를 잡아놓고 눈물이 줄줄나오는 글을 브런치에 올리고도 싶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 안에서, 또 사회 안에서 옳고 가치 있다고 여기는 태도와 그렇지 못한 내 마음 사이에서 수천 번씩 갈등이 일어나고 늘 ‘나는 언젠가 벌을 받고 말 사람. 누릴 자격이 못 되는 사람’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대부분은 신경쓰지 않으려 하지만 어쩌다 몇 마디만 오가도 금세 서로 간에 팽팽해져서 터지기 직전까지 감정이 차오른다. 나는 '역시 예나 지금이나 냉정한 사람'이라고 결론 내리고 어머니는 '지독하게 예민해서 가족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서로 만날 길 없이 평행선을 달리는 감정이다.


그러면서도 다시 칼을 들고 팬을 달궈 요리를 하는 건 여전히,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받고 싶은 어떤 마음이 내 안에서 끓어오르기 때문이다. 무뎌지지도 못한 채 날을 갈아 세워 들이밀 기회만 살피는, 영원히 차지 않는 밑빠진 독처럼 공허한 마음이 끔찍스러우면서도 안타깝다. 내 마음속 '효심'이라는 항아리는 차오르길 기다리지만 여전히 차오를 수 없는 가련하고 애틋한 처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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