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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호 Oct 19. 2019

[서평] 디지털 시대,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인간 인터넷』, 마이클 린치, 사회평론

[서평]

인터넷에 접속하면 맞춤형 팝업 광고가 뜬다. 내가 영어학원을 다녔던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학원 광고가 계속 뜨기도 하고, 커피 원두 혹은 핸드로션 같이 내가 구매했거나 구매할까 망설였던 물건들이 뜨기도 한다. 어쩌다 인터넷 접속기록을 보면 포털 사이트가 나보다 더 나를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놀랄 일이 있었는데 휴대폰 안에는 ‘저장된 와이파이 목록’이 남아있어서 내가 그동안 어디를 돌아다녔는지를 숨김없이 보여준다는 것이다. 편리하기도 하고 무서운 세상이다. 예전에는 이런 점들이 불편해서 인터넷 공간 안에서 꼬리를 잘 자르고 다녔는데 요즘은 (다른 의미에서) 편리하다는 생각이 들어 빅데이터의 추천을 받아들이곤 한다. 

    

이 책의 저자인 마이클 린치는 인터넷의 출현을 문자의 발명에 버금가는 혁명으로 보고 인터넷이 우리 생활은 물론 지식체계와 의식세계도 바꾸어놓을 것이라고 한다. 인터넷의 출현은 커다란 변화이므로 여기서 비롯된 생활의 편리함이 존재하지만, 그 외 인터넷의 여타 속성들이 우리의 삶을 위협할 수도 있다고 우려를 표한다. 가령 인터넷 환경은 수용적인 태도를 갖기 쉽게 하여 합리적 판단을 등한시하는 개인이 되도록 하거나, 다양한 사고를 받아들이기는커녕 자신에게 편안한 주장만을 고수하는 꼰대가 되게 할 수도 있다. 사회 안에서는 정보의 불평등으로 인해 차별이 심화되도록 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인터넷 환경의 가장 큰 특징은 지식과 정보가 무한히 생성되며 그에 대한 접근성 또한 낮다는 점이다. 누구나 인터넷에 접속만 하면 지구 반대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다. ‘OO동 맛집’이라고 검색만 해도 무수히 뜨는 정보들을 확인할 수 있고 식당 메뉴판에서보다 고화질의 음식 사진을 확인할 수 있다. 마이클 린치는 이러한 환경이 보르헤스의 바벨 도서관과 같다며 우려를 표한다. 바벨 도서관에는 수많은 정보들이 있지만 그 정보들이 옳은지 알 수 없으며 그 도서관에서 벗어날 수도 없기에 정확한 근거에 기반을 둔 합리적 판단을 저해할 우려가 있다. 이러한 도서관 안에서 지식인들은 저마다의 주장이 옳다고 주장하고 개인들은 자신의 취향에 맞는 주장에만 귀를 기울여 '집단 극화(group polarization)'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도서관 안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상대편의 책을 불살라버리는 파괴적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다. 성숙한 인간과는 거리가 먼 해결 방식이다.     


저자는 사물 인터넷을 넘어 뉴로 미디어(초소형 스마트폰이 사람의 뇌와 직접 연결된 기술)가 등장하여 현실과 가상현실 간의 경계가 모호해질 것이며 인간도 네트워크의 일부가 된 탓에 지식을 타인에게(혹은 공유 드라이브)에 의존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가령 예전에는 친구의 전화번호 몇 개쯤은 쉽게 외웠지만 요즘은 그럴 필요성이 없어졌다거나 USB자료가 날아갔다는 지인의 말에 함께 기함(엄밀히 말하면 조금 결이 다르지만)하게 되는 일 등이다. 저자는 지식의 형태도 바뀌었다고 하는데 고전적 지식이 기존의 변하지 않은 토대에 지식을 쌓아 올리는 형태였다면 오늘날의 지식은 평면 위에서 누구나 접근 및 편집이 가능한 형태를 띤다. 위키백과를 떠올리면 이해가 쉬워진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인간에 대한 기대를 놓지 않는다. 오늘날의 사회를 철학자의 입장에서 분석하고 문제의식을 던지면서도 말미에는 꼭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이라는 전제를 붙인다. 가령 이런 식이다. 인간은 인터넷 환경 안에서 수용적이 되기 쉬워 합리적 사고를 적게 하게 될 위험성이 있지만 그만큼 ‘진실’에 대한 욕구가 강하기에 ‘진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본문에서 SIM실험 참조) 인간의 창조성이나 순간적인 통찰력만큼은 어떤 기술로도 따라잡을 수 없는 영역이라고도 한다. 인간은 때로 너무 쉽게 성찰 없는 직관적 판단을 하지만 직관적 판단이 꼭 그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또 시간을 주고 생각하게 하면 그릇된 판단을 하다가도 다시 돌아와 옳은 결정을 한다. 직관을 ‘촉’이라는 요즘 말로 바꾸어보면 ‘촉은 내가 그동안 경험한 무수한 빅데이터의 결과’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언젠가 교내 뇌공학과 실험에 피험자로 참여한 적이 있다. 나름대로 신선한 경험이었는데 연구실을 나오면서 ‘만약 계속 뇌 과학이 발달하면 인간 머릿속의 생각들을 펼쳐놓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게 된대도 불구하고 인간의 뇌 속의 무수한 지식이나 경험들을 어떠한 기준으로 어떻게 분류할지는 여전한 의문이다. 기준을 잡기에 따라 무수한 경우의 수가 나올 수 있으니 기술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인간이 기술에 지는 일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도 된다.      


마이클 린치는 이후 책의 후반부에서 인터넷이 민주주의, 지식의 접근성 문제, 교육, 노동 문제 등 사회의 여러 측면에 미칠 영향을 제시하고 우려 섞인 당부를 잊지 않는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이라는 희망도 놓지 않는다. 그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에 필자 또한 예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었고 많은 부분 동의하기에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읽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해?’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바벨 도서관에서 벗어나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해 사람들과의 면대면 교류를 늘려야 한다거나, ‘이 문제를 해결할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마이클 린치는 철학자이고 인문학자 이므로 통찰과 연구를 바탕으로 한 의미 있는 문제의식을 던지면 족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아쉬운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기의 유명한 학자가 ‘아직 희망은 있다’고 하여주니 마음은 편안해지기도 한다. 여러 가지 툴에 약한 사람이지만 오늘부터라도 열심히 공부(?)해서 기술로부터 내 정보를 어떻게 지킬지 어디까지 보여줄지를 내가 결정해야겠다. 주체적 인간이 되기 위하여.




 [ 인상 깊은 문구 ]

얼마 전에 우리는 ‘정보 과잉’ 시대에 살고 있으며. 정보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정   보 ‘과부하’ 상태에 빠졌다고 흔히 이야기했다. 여전히 그렇게 느끼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의 사람들은 정보에 압도당한다는 것을 점차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p.27
윌리엄 제임스는 일단 이러한 사조가 용솟음치기 시작했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것을 멈추려고 시도하는 것은 강에 막대를 꽂는 것과 같다. ‘강물은 장애물을 돌아서 흘러가 ’아무 영향도 받지 않고 목적지에 도달한다. ‘ 제임스의 말은 일리가 있지만, 그래도 나는 강에 막대를 또 하나 꽂으려고 하는데, 이것은 내가 내 아이폰에 불만이 있거나 지식의 성장에 반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보다 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성찰 없는 수용은 위험하다.    p.28
구글은 정보를 창조하지 않으며, 다만 전달만 할 뿐이다.    p.49 
인터넷이 극화를 조장하는 한 가지 이유는 “그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암시를 받으면서 극단적인 입장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비슷한 성향이면서 거기에 노출되는 사람은 당연히 그것을 믿는 쪽으로 이동할 것”(캐스 선스타인) 이기 때문이다.    p.76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이 정말로 정의를 위한 욕구가 동기가 되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자신의 견해를 합리적 근거로 옹호하는 사람은 ‘정말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p.92.
하지만 개인은 합리적 근거에 민감한 정도에 따라 객관적이거나 객관적인 태도를 가지 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p. 132     
완전히 자율적인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이와 반대로 그런 결정에 명확한 태도가 반영되며, 그 결정은 완전한 자신의 것이다. 나중에 이 문제를 다시 곰곰이 생각하더라도, 그는 그 결정이 자신의 깊은 가치들을 반영한 것이라고 인정할 것이다.    p.156-7 
지식은 투명할 수 있지만 권력은 투명한 경우가 드물다.   p.167     
우리의 디지털 삶의 형식은 우리의 이해능력을 경시할 때가 많은데 이해는 단지 더 많은 데이터만으로는 제공할 수 없는 것이다.    p.238 
데카르트는 늦잠꾸러기였다. 가능하면 정오 무렵까지 침대에 누워 (사색을 하면서) 빈둥거리는 버릇이 있었다.(장래희망!!-*작가의 말)     p.254 
이해의 창조성은 이해가 단지 우리를 어디로 안내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만으로도 최고의 가치와 중요성을 가진 인지 행위라는 우리의 직관적 느낌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p.265
우리는 기술이 항상 우리의 관점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기술이 안으로 이동할수록 관점을 바꾸는 이 효과는 증가하기만 할 뿐이다.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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