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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호 Oct 10. 2019

주문하신(?) 밀크티 나왔습니다

자기 안에서 벗어나는 훈련을 하다


유난히 정신이 없는 날이 있다. 아니 나는 보통 정신이 없는 것 같다. 차분하고 조용해 보이는 외모와 다르게 덜렁거리고 실수도 많이 해서 얼굴로만 나를 판단한 이들은 나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 이후 실망감을 두 배로 느끼기도 한다. 이렇다 보니 스스로도 많이 조심하려는 편이다. 게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자기 안으로 파고드는 성격이라 일이 생길 때마다 지나치게 자아성찰을 한다. '어버버 거림 -> 자아성찰 -> 너무 깊이 성찰을 해서 현실로 빠져나오지 못함 -> 어버버 거림 -> 자아성찰' 루틴을 반복하는 것이다.


교내 근로가 끝나고 수업에 들어가기까지 여유가 좀 있어서 요기도 할 겸 학교 근처 밀크티 전문점에 갔다. 손님이 많아서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직원도 한 명 뿐이라 세네 명 씩 주문을 받고 음료를 만들고 다시 세네 명 분의 주문을 받는 모양인데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차차 지쳐갔다. 과제를 한답시고 커피를 주야장천 마셔댔더니 며칠 잠을 못 잤던 탓에 카페인이 없는 루이보스 밀크티를 주문해야겠다고 속으로 되뇌고 있었다. 앞서 밝힌 나의 특성인 '덜렁거리고 실수도 많이 한다.'에는 '낯선 상황에서 어리바리함'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버버 거리지 않고 똑 부러지게 주문을 하기 위해서였다.

 

'얼그레이'와 '루이보스'는 엄연히 다른 종류이고 맛도 다르지만 이미 반쯤 정신이 나가 있던 나에게는 둘 다 어려운 외국차(茶) 단어일 뿐이었다. 내 차례가 다 와가서 메뉴판을 다시 보며 정확한 메뉴명과 당도, 얼음, 테이크아웃 여부 등을 학습(?)하다가 '루이보스 밀크티에 당도와 얼음은 보통'을 연습하고 있어야 할 내가 '얼그레이'라고 말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행히 내 앞에 유학생 두 명을 두고 주문이 끊어졌는데 순서를 기다리며 헷갈리지 않고 주문을 할 시간을 더 벌 수 있었다. 유학생 두 명 중 한 명의 음료가 먼저 나오고 내 음료가 나왔다.  음료를 받은 나는 수업이 있는 건물을 향해 길을 발걸음을 옮겼다. 적어도 밀크티 비닐 포장 위에 적힌 글귀를 보기 전까지는.




수업이 있는 건물까지 3분의 1쯤 지나왔을까. 밀크티 비닐포장 위에 'OOO 그레이 백작'이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그레이 백작?! 이게 얼그레이 밀크티??!'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아래에서는 작가의 비합리적인 생각이 나열됩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음료를 잘못 가져온 일로 경찰서에 가는 생각까지 했다.' 정도가 됩니다.)

 '나는 분명 루이보스를 주문했는데 왜 그레이 백작이지? 주문을 잘 못 했나?'
결국 내 입이 실수를 한 모양이라며 영수증을 살폈는데 영수증에는 '루이보스 밀크티'가 적혀 있었다.
'뭐지? 주문이 잘못 들어갔나?', '주문실수가 날 리가 있나?', '아니 잠깐 음료가 보통 순서대로 나오기 마련인데 내가 내 앞의 주문자보다 음료를 먼저 받았지 않은가. 혹시 그 사람의 음료를 잘못 가져온 건가? 어쩌지? 지금이라도 매장에 가봐야 하나?', '앞의 손님이 유학생이었는데 상황을 설명한다고 알아들을 수나 있을까?' '나 때문에 음료를 잘못 받았을지 모를 그 사람도 새로 제공된 음료를 받았을까?', '지금 당장 매장으로 간다 해도 상황은 종료된 이후겠지? 나오기 직전까지 카페에 손님도 많던데 갔다가 헛수고만 하는 거 아닌가.......'
 스마트폰을 켜서 나와 같은 사례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안타깝게도 그런 안내는 나와 있지 않았다. 너무 여러 상황들을 생각하느라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음료 사이즈를 보니 평소보다 크기가 더 큰 거 같은데 사이즈업이 된 거면 사이즈업 비용 500원을 더 물어내야겠지?', '가만, 아무리 실수라고 해도 도둑질인가? 포돌이가 와서 찰캉찰캉...'


앞서 밝혔다시피 일이 생기면 자아성찰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하느라 현실적인 대처가 늦어지는 편이다. 생각은 어느새 카드 결제내역을 추적해서 경찰이 오고, 경찰이 '음료를 잘못 가져온 사실을 언제 깨달았느냐'라고 추궁하는 데까지 와 있었다. '언제 알았다고 말해야 하나. 음료가 바뀐 거 같았지만 긴가민가 했다고 해야 하나? 내 스마트폰 검색 기록을 열람하면 '음료가 바뀐 정황'을 검색한 사실도 알게 될 텐데 그럼 범죄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 되나? 가중처벌이 되겠지?' 글을 읽는 이들이 보면 '저 사람 바보 아니야?' 하는 생각을 하겠지만 당시 나는 다른 이성적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고민을 하다가 강의실에 이르렀다. 친구가 먼저 와 있길래 나의 상황을 주저리주저리 설명했다. '내가 카페에서 음료를 잘못 가져온 거 같다. 루이보스를 시켰는데 여기 그레이 백작이라고 쓰여 있지 않느냐.'는 내 말에 친구는 웃으며 "언니, 제가 거기서 아르바이트해 봤는데 그거 랜덤이에요."라고 대답했다. 얼그레이랑 루이보스는 맛이 다른데 먹었을 때 다르지 않았냐고도 물었다. "컵 포장 비닐은 랜덤"이라는 말 한마디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러고 보니 두 차의 맛은 서로 다르다. 내가 들 온 음료의 맛은 아무래도 루이보스가 맞는 것 같다. 자리에 앉아 찬찬히 돌이켜보니 나보다 앞에 주문한 유학생은 '얼음을 빼 달라'는 주문을 했던 기억이 났다. 내 음료엔 아직도 얼음이 남아서 컵 표면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자기 생각의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릴 때가 많다. 성격검사를 해보면 원래 그런 성향이라고 나오긴 하지만 내 삶이 지나치게 피곤해지니 고쳐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찰나에 든 그러한 생각이 오래 이어지는 탓에 전체를 망치는 일이 부지기수다. 밀크티 사건만 해도 좀 더 신중히 맛을 음미해보거나 찬찬히 기억을 돌이켜 '앞선 손님이 얼음을 빼 달라고 했다. '는 사실만 기억했어도 이렇게 오래 마음을 졸이지는 않았을 거 같았다. 세상에 '그레이 백작'이라는 컵 포장지의 문구 하나만 보고 '내가 얼그레이 음료를 가져왔을 것'이라고 생각하다니. 이야말로 자동적 사고의 오류가 아닌가.


사람이 자기 타고난 성향이나 오래된 습성을 고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다시금 깨닫는다. 그러고 싶지 않아서 내내 노력하고,  다짐을 하고, 또 글을 쓰며 마음에 꼭꼭 담아두어도 쉽게 학습이 되지 않는다. 지금도 그 일을 잊지 못해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다. 밀크티 사건이 있었던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워서도 그 일을 돌이키다 잠들었다. 이미 지나간 일을 또다시 파고들고 있으니 여기에만 빠져있다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해 또 실수를 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고개를 든다.


 무책임하지만 당장에는 어쩔 수 없으니 살던 대로 그냥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다 보면 먼 훗날에는 조금 괜찮아져 있겠지. (일이 있은 뒤 이 주일 뒤인 오늘, 아무 일이 없나 그 카페에 다시 가보려다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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