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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호 Oct 13. 2019

여섯 살 인생 첫 번째 요리

동생아 언니가 만든 멸치무침(!) 먹어라

가끔 엄마를 따라 유아 관찰 프로그램을 본다. 보다 보면 괜히 마음이 짠해질 때가 있는데 둘째에게 밀린 첫째들의 모습을 볼 적마다 그렇다. 엄마나 아빠의 관심을 받기 위해 애를 쓰는 아이의 모습에서 첫째의 서러움이 보여 그런 아이들이 나오면 슬쩍 내 방으로 가기도 한다. 그런데 그중 어떤 아이는 유난히 동생에게 잘해준다. 동생이 미울 법도 한데 쓰다듬어주고 끌어주고 감싸주는 것을 보면서 '나쁜 어른'인 나는 의아한 생각을 한다. '저거 동생에게 잘해줌으로써 엄마의 관심을 받기 위한 행동 아니야?'라는.


편하게 TV나 볼 일이지 거기서도 울컥하고 때로 삐뚤어진 생각을 하고 있는 이유는 내가 첫째이기 때문이다. 동생이 한 미울 때는 그 녀석이 자주 입었던 '진분홍 바탕에 노랑 사자가 그려진 양털 조끼'만 봐도 세모눈이 되곤 했다. 동생이면 언니 말을 고분고분 듣기나 할 것이지 화가 난다고 냅다 크리스마스 트리에 있던 장식을 집어던지다니 지금 생각해도 열이 받는 일이다. 그런데 나도 동생에게 친절한 언니였다. 매번 싸우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엄마가 동생이 하는 말을 못 알아듣겠어서 나한테 물으면 내가 다 통역을 해줬다고 하니 우리 자매 사이는 꽤 끈끈했던 셈이다. 같이하는 공주 놀이는 또 얼마나 재밌었는지 모른다. (TMI:나는 오로라 공주였다가 샬스롬 공주로 바꿈. 꾸러기 수비대에 그 오로라공주 맞고 샬스롬은 내가 지은 이름임)

 

동생과 나름 잘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과연 어린 나의 진심이었을까'하고 생각한다. 어찌 되었든 동생한테 잘해주면 엄마가 좋아하시던 기억은 뚜렷하게 난다. 시장에 간 엄마가 유난히 늦게 오신 날이 있었다. 빨간 곰돌이 시계의 시침은 '4'를 넘어있는데 엄마는 오시지 않았다. 안방 창문으로 들어오던 노란 햇살과 둥둥 떠다니던 먼지까지 기억나는 걸 보니 엄마를 기다린 시간이 길긴 길었구나 싶다. 그리고 그날은 내가 최초로 요리를 한 날이기도 하다. 고작 여섯 살이던 내가 말이다.


엄마는 늦고 있었고 동생은 배가 고프다고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엄마가 곧 오실 거야'하고 동생을 달래 봤지만 어린 동생 결국 와앙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배가 고파서 우는 동생을 보고 있자니 안쓰럽기도 하고 언니로서 책임감이 느껴지기도 해서(+엄마에게 칭찬받고 싶어서였을 가능성 있음) 냉장고를 뒤졌다. 냉장고를 보니 다른 것은 없고 냉동실 안에 멸치가 있었는데 그걸로 동생에게 반찬을 해줘야겠다 싶었다. 까치발을 들어 멸치를 꺼내고 각종 양념을 꺼냈다. 멸치반찬에 뭐가 들어가는지 잘 모르지만 고소한 맛이 났던 기억은 나서 참기름을 넣고, 싱거우면 안 되니까 간장을 넣고, 엄마가 요리를 할 때 보면 마늘은 꼭 넣는 거 같아서 마늘도 넣었다.


동생은 자그마한 간장 접시에 담긴 멸치 무침을 찬밥과 함께 맛있게 잘 먹었다. 멸치 볶음도 아닌 생멸치 무침을 무슨 맛으로 먹어줬는지 모르겠다. 아마 그런 반찬은 있지도 않을 것 같다. 프라이팬에 볶지도 않아서 비린내가 나기도 했을 텐데 잘 먹는 동생 모습에 마음이 뿌듯해졌다. 정작 엄마가 오셔서 뭐라고 하신 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아무튼 그건 내가 처음 만든 요리였다.


나의 첫 요리는 이도 저도 아닌 무엇이었지만 첫 길을 잘 터둔 덕에 지금도 자주 요리를 한다. 멸치볶음 만드는 법도 알아서 그렇게 갖은양념만 넣고 함께 무치지도 않는다. 내 배를 채우기 위해 요리를 하기도 하고 취미로 하기도 한다. 다년간의 주방일로 지친 엄마를 대신해서 명절에는 가족들이 먹을 각종 전과 튀김을 하기도 한다. 물론 일 분담이 너무 안되면 투정을 하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즐겁게 임하고 있다.


브런치 글을 보다 보면 요리에 관한 에피소드를 쓰는 작가님들이 꽤 계신다. 읽어보면 감동을 자주 받는데 요리 안에는 누군가와 함께한 진솔한 추억이 들어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내가 가진 편견 중에 '요리를 줄곧 하는 사람은 '친하게 지내도 좋을'사람이다.'라는 것이 있는데, 차분히 조리과정을 따라가며 자신이 먹을 것을 준비한다는 면에서 책임감이 있어 보이기도 하고 요리 안에는 '함께 먹을 누군가'가 들어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어린 내 마음 안에 어떤 감정들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동생이 멸치무침을 먹는 모습을 바라볼 때는 순수하게 뿌듯하고 기뻤다. 맛있게 먹어줘서 고맙다 동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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