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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호 Dec 27. 2019

[서평]'초연결'시대가 도래한다고 하는데

W. 데이브드 스티븐슨,  '초연결'.

브런치 분류 기준에 의해 이 글이 IT/트렌드 카테고리에 들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글은 기술에 무지한 이가 책 한권을 겨우 읽고 쓴 서평일 뿐입니다. 원하시는 정보는 드리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저자가 말하는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호한 상태로 읽었다.


글을 시작하면서

Q: ‘테슬라는 과연 자동차 산업계의 서브웨이(고객 맞춤 샌드위치)로 부상할 수 있을 것인가?’

A: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책을 읽기 시작한 것부터가 늦었다. 우여곡절 끝에 전자책을 구입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디지털 현실에 적합한 읽기 방식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모호하고 맥락이 잡히지 않았다. 나는 최첨단 기술과는 너무 먼 분야를 전공으로 선택하고 접하는 사람이다. 무지에서 기인한 사태라고 생각해본다.


읽는 내내 의문이 들었다. 습관적으로 디스토피아를 상상하며 읽기도 했다. 책에 덧붙인 인덱스의 대부분이 ‘하지만-’으로 시작했고 의구심이 담겨있었다. ‘나는 진정 불안에 잠식되어 있고, 보수적이며 꽉 막힌 인간인가?(혹시 꼰댄가?_호환마마보다 무서운 꼰대)’라는 생각을 내내 했다. 인간. 반성. 두려움. 의구심. 약간의 낙관. 이 다섯 가지가 책을 읽고 한 생각의 집합이다.


인간_인간의 자리는 어디일까?

책을 읽으며 여러 고민들을 적었다. 서평을 위해 모아보니 그러한 고민들은 모두 ‘인간’에 관한 것이었다. 특히, 가장 기억에 남았던 개념은 ‘디지털 쌍둥이(Digital Twins)’였다. 이러한 기술이 사물에 쓰이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었지만 인간에게까지 도입된다고 했을 때는 우려를 했다. 좀 철학적인 생각도 했다.


디지털 쌍둥이는 공간조차 차지하지 않고 화면상에만 존재하는 대상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런 대상을 접하게 될 인간은 이전과 똑같이 자기 인식을 하게 될까? 가끔은 사진 속의 ‘나’를 보아도 낯설 때가 있는데 화면상에서 ‘수치화되고 객관화된 나’를 보는 기분은 어떨까. 태어날 때부터 그런 현실을 접한 인간의 정체성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꿈에서 대상화된 나 자신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 걱정을 안고 사는 사람이라서 좀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으면 꿈에 그대로 나온다. ‘현실의 나(A)’는 ‘꿈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나(B)’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때론 ‘나 B’가 평소 습관에 따라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본다. ‘나(A)’는 앞으로는 저러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디지털 쌍둥이’를 갖는 것도 이런 느낌일까?


좀 더 깊이 생각해보자. 책에서 나열된 내용은 디지털 쌍둥이를 통해 몸의 이상이나 변화를 감지하는 차원이다. 그러나 기술이 더 발달하여 인간의 감정까지 수치화해서 보여줄 수 있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현재의 내가 어떤 감정을 얼마만큼 느끼는지 보여준다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오히려 더 혼란스럽지는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감정을 느끼는 일을 인간 고유의 속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기술과는 동떨어져 살고 있는 나는, 기술의 힘을 빌리지 않고 내가 느끼는 대로 살고 싶었다.


저자는 계속해서 초연결 사회가 되면 효율성이 크게 증가할 것이라는 진단을 한다. 책의 서두에 소개된 쓰레기통은 통이 다 차면 알아서 알려준다. 노동자가 아직 비울 필요가 없는 쓰레기통까지 가는 수고를 줄인다. ‘세넷’에서는 남은 기름의 양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기름 운송에 효율성을 더할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공장에서는 각 공정에서 문제 상황이 발생하기 이전에 장치에 부착된 센서가 이상을 감지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 인간의 자리는 어디일까? 당장 펜실베이니아 공장 노동자의 수는 2000명에서 800명으로 줄었다. 숙련공에게 기계의 이상을 감지하게 하는 위험을 떠안느니 IoT를 어서 도입하라고 한다. 저자는 한참 기술 이야기를 하다가 끝에 가서 ‘그래도 인간은 필요해.’라고 덧붙인다. 하지만 소외될 인간과 해고된 노동자에 대한 해결책은 없다.


기업가 입장에서 노동자의 사정까지 고려할 의무가 없다는 반박이 나올 수도 있다. 해고된 1600명의 노동자는 불성실했던 것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같은 노동자들도 일은 성실히 하지 않고 월급만 챙기던 동료들을 달가워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물러서서 생각해도 쉽게 동의가 되지 않는다.


물론 사용자의 운전습관을 분석해 보험료를 책정하는 시스템이나 심전도를 실시간으로 분석하는 ‘카리마’의 도입은 환영할만하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여전히 의구심이 든다.


의구심_과연 낙관적이기만 할까?

저자는 계속해서 낙관적으로 미래를 전망한다. 하지만 정말 낙관적이기만 할까? 기술의 발달을 이야기할 때 늘 등장하는 문제는 비용과 빈부격차 문제이다. 늘 나오는 이야기이므로 불필요하다는 반응은 곤란하다. 기술이 아무리 상용화되어 단가가 낮아진다고 해도 소외되는 이들은 발생한다.


‘버터플라이 IQ’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저자는 논의를 하면서 ‘누구나 갖고 있는 영상장치가 있는데 그건 바로 스마트폰이다.’라고 진술한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따졌을 때 ‘누구나’에 속할 수 있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스마트폰을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전제하는 것 자체가 이미 ‘가진 자만을 위한 기술’인 것처럼 느껴진다.


또한 과연 저자의 말대로 포도농장과 굴 양식장에까지 속속들이 IoT기술이 들어올 수 있을까? 그것도 10년 안에? 방향이 좀 다르지만 최근 도입된 키오스크 사례를 들어보겠다. 키오스크 도입은 매우 빠르게 이루어졌는데 그에 따른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게 나타난다. 노인들은 이미 주문에서 소외되고 있으며 비교적 적응력이 빠른 젊은이들도 종종 어려움을 느낀다. IoT기술을 따라잡는 소수와 그렇지 않은 이들 사이의 간극은 무엇으로 좁힐 수 있을까?


초연결 사회가 되면 기업들이 정보공유를 활발히 하여 누구나 필요한 정보 안에 접근할 수 있다는 내용도 지나친 낙관론처럼 보인다. 과연 기업 경영자들은 정보공유를 하려할까? 그들이 전 직원에게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 이유는 기술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저자는 책의 후반부에서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결국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한다고 하지만 인간은 늘 합리적인 선택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기술에 대한 두려움_안전한 건가요?

한편으로 드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이는 앞서 밝힌 의구심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는 내내 낙관적인 전망을 하지만 개인정보 유출에 있어서만큼은 우려의 목소리를 낸다. 기업이 고객의 개인정보유출 문제를 소홀히 다룬다면 기업은 더 이상 고객을 확보하지 못할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인다. 고객은 개인정보 유출에 공포까지 느낀다고 했는데 저자에게 처음으로 공감했다.


개인정보 유출은 내가 가장 우려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내가 너무 꽉 닫힌 사람 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 정보가 새어나갈 가능성이 0.0001%라도 있다면 차라리 불편을 감수하는 편을 택하겠다. 특별히 ‘남들이 알아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살아오지는 않았다. 그저 ‘나’라는 인간이 원하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도 유출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초연결로 모든 정보가 연결된 이후라면 정보유출 피해는 더 심각해진다.


무지에 대한 반성

앞선 논의들을 부정적으로 이어왔지만 책을 읽는 내내 저자를 비판만 하면서 읽은 것은 아니다. 다른 장르의 책을 읽을 때보다 더 자아성찰을 하면서 읽었다. 착한 독자가 되어, 저자가 ‘디지털 트윈스의 영상을 보고 책을 읽으라.’고 하면 그대로 따랐다.


자동차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는 동안 ‘기술이 저렇게 발전하는 동안 나는 뭐하고 살았지?’라는 생각을 했다. 디지털 트윈스까지 갈 것도 없이 자동차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아주 한참 전이다. 내내 타고 다니면서도 내가 탄 버스가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앞에서 세 장에 걸쳐 우려의 말만 써놓고 디스토피아를 상상한 책임은 기술에 무관심했던 나에게 있는 것 같다.


글을 마치면서

저자는 내내 채근한다. “세상이 바뀌고 있어. 너 그렇게 계속 앉아만 있을 거야? 그랬다간 도태되고 말걸? 세상의 바뀌는 시류를 따라가야지.” 솔직히 말하면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너무 개인적인 불편함인가? 물론 필자는 ‘초-’로 시작하는 여타 단어와 혁신, 파격, 속도 등의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가치판단이 아닌 그저 취향의 문제다.


너무 개인적이므로 논리적인 이유를 덧붙여 반박을 해보겠다. 글을 쓸 때 기본원칙은 주제, 대상(독자), 목적을 고려하고 쓰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저자가 대상으로 삼은 독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글의 목적은 무엇인가? 대상이 ‘기술변화 시대를 살아갈 대중’이 되었다가 ‘기업가’가 되었다가 다시 ‘대중’으로 옮겨간다.


글의 초반부(저자가 Digital Twins얘기를 하며 ‘여기까지 알아들었는가?’라고 하던 부분)까지 대상은 기술이 발달하고 있는데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범인(凡人)들이다. 그런데 이후 대부분의 내용에서는 기업가가 대상이다. 수많은 기업의 사례를 열거하고 ‘너의 기업체가 도태되게 내버려 두지 말라.’고 한다. 재밌는 점은 책의 마지막 <후기>에 와서는 다시 기술변화의 기본 흐름도 모르면서 아이폰의 다음 세대나 찾는 범인(凡人)들을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저자를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정보전달을 하는 책이니 그 안의 정보는 양질일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으므로 무지로 인해 깊은 이해가 불가능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기술에 얻어맞던 인문학도가 객기를 부려봤다. 책을 읽는 내내 따라다녔던 기술에 대한 불신과 불안을 맞서려는 꿈틀거림이다. 여전히 모호한 상태로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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