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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Apr 21. 2022

한마디 따스함의 찬란함, <태어나길 잘했어>

나도 따스함을 나눠줄 수 있다면

춘희 씨 손에 꽃이 피었네요.


이 한마디의 대사가 나를 극장으로 이끌었다. 맥락도 모르고 상황도 몰랐지만, 저 말이 너무나 따뜻하게 느껴졌기에. 꽃이 피었다는 말. 손에 꽃잎이 내려왔던 걸까? 아니면 손바닥에 무슨 자국이라도 남아있던 걸까? 무엇이 정답인지도 몰랐던 그때, 더 큰 의문이 내 마음속에 떠올랐다. 나는 누군가에게 저런 말을 해준 적이 있었던가. 따스함을 전한 적이 있었던가. 어째서 난 그러지 못했을까. 자문하고 또 자문하며, 극장으로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영화 <태어나길 잘했어>는 정말로 특이하다. 특별한 내용도, 놀랄만한 반전도, 상상치 못한 전개도 없지만, 올해 본 그 어떤 영화보다도 찬란하게 빛났다. 봄날의 해님처럼 따스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일상 속 장면들이었지만, 나도 몰래 미소가 머금어지고 눈물이 새어 나왔다. 영화 속 오고 가는 말들이 너무나 고마워서. 그들의 마음에 조금 더 다가가고 싶어서. 영화가 담고 있는 찬란함에 나까지도 빛을 나눠 받은 것만 같았다.



물론 주인공 춘희(강진아)의 삶은 밝음과는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었다. 갑작스레 부모님을 사고로 떠나보내고 친척집에 얹혀살아야만 했던 날들. 모두가 외식하러 나간 사이 혼자 끓여먹어야만 했던 라면들. 난방조차 들어오지 않는 좁디좁은 다락방과 야속하게도 자꾸만 흘러나오는 축축한 다한증의 증거들. 추억이 되었을 수학여행은 가보지도 못했고, 남들이 다 입는 예쁜 옷 한 벌 입어보지 못했다. 어린 춘희에게 세상은 너무나도 날카로웠다.


영화 속에서 춘희는 이렇게 물었다. 만약 어린 시절의 나와 만난다면 어떨 것 같냐고. 그러자 영화는, "한번 꽉 안아줄 거 같아요."라고 답했다. 그래, 이때부터였다. 나도 춘희도,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나아가기 시작한 게. 극장에 가득 안고 들어온 스스로의 의문에 답을 할 수 있게 된 게.



나는 언제나 상처를 되새기며 살아왔다. 잊지 말라고. 흘려보내지 말라고. 스스로의 손에 칼날을 쥐어주면서 언제나 아파하라고 밀어붙였다. 분노하지 않으면 세상을 버틸 수 없다고 믿었기에. 아픔을 잊으면 또다시 상처 입게 될 거라고 믿었기에. 상처 난 자신을 안아주기보다는, 그 상처가 아물지 못하게끔 자책하고 자학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차가운 세상에서 나마저, 아니 어쩌면 내가 가장 나 자신에게 날카로웠으리라. 그러니 내가 따스함을 바라볼 수 있을 리 만무했지.


그랬던 내게 영화는 괜찮다고, 아플 수도 있다고, 하지만 그건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이 작품의 캐치프레이즈처럼 나를 빈틈없이 안아주었다. 그제야 눈이 뜨이더라. 따스함을 따스함이라 받아들일 수가 있더라. 나 자신을 포함해 이제껏 지나쳐온 수많은 소중한 사람들에게, 왜 더 잘해주지 못했을까, 왜 한마디라도 더 예쁘게 말해주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이 작품은 필시 후회하게 하기 위한 영화는 아닐 테지. 이제라도 나를 안아주고, 그 온기로 내일을 바라보라는 영화겠지.



영화를 보고 나니, 나도 따스함을 나눠주는 영화 속 그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아픔을 겪었음에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솔직하게 건네는 한마디의 따스함이 얼마나 찬란한지 이제는 알게 되었으니까. 그 빛을 나도 나눠 받을 수가 있었으니까.


어떻게 모든 게 눈꽃처럼 아름답겠어. 어떻게 매일이 봄날처럼 포근하겠어. 그래도 누군가와 온기를 나눌 수가 있다면. 함께 저 멀리까지 걸어갈 수 있다면. 분명 우리 모두 태어나길 잘한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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