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Veni Jun Sep 23. 2018

도가 지나친 도구화, <더 프레데터>

감독 혼자 만족하는 나쁜 영화

20세기 폭스가 배급하는 영화가 개봉하기 하루 전날 저녁, 충무로의 대한극장에서는 블라인드 시사회가 열린다. 본디 블라인드 시사회가 있는 날에는 오늘 보게 될 영화가 무엇일지 알 수 없으니, 기대 반 불안 반의 두근거림을 안고 극장으로 향하게 된다. 개봉 예정 영화와 아직 국내에 정보가 퍼지지 않은 해외 개봉작들을 살펴보며 어떤 영화를 보게 될지 추리해보는 것은 블라인드 시사회만의 묘미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다음 날이 폭스사의 신작이 개봉하는 날이라면 그러한 궁금증을 느낄 필요가 없다. 오늘 관람할 베일에 싸인 작품이 바로 그 작품이니 말이다. 그렇다. 블라인드 시사회가 있었던 9월 11일, 다음날은 <더 프레데터>의 개봉일이었다. 여담이지만, 굳이 개봉 전날 블라인드로 시사회를 진행하는 건 대한극장의 뜻일까, 20세기 폭스의 뜻일까?


2010년 개봉한 <프레데터스> 이후 다시 무대를 지구로 옮긴 ‘프레데터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 <더 프레데터>는 개봉 이전부터 국내외로 큰 주목을 받았다. <프레데터 1>에 출연한 원년멤버이자 <아이언맨 3>의 감독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셰인 블랙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기에, 여름 극장가를 뒤흔들 시리즈의 부활을 기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시리즈의 부활이 아니라 시리즈의 사장(死藏)이었다. 감독은 대중과 즐기기 위한 영화가 아니라 오로지 본인만이 즐기고 만족하기 위한 영화를 만들어냈으며, 그럴 필요가 없는 것 그리고 그래서는 안 되는 것까지 도구로써 영화 속에 집어넣었다.



제일 먼저 그는 시리즈의 상징이자 영화의 제목인 프레데터를 도구로 전락시켰다. 나에게 있어 프레데터는 압도적으로 강하며 호전적이지만 어딘가 신사적인 외계인이었으며, 그들에 의한 ‘사냥’과 인간들의 ‘극적인 승리’로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끔 하는 것이 프레데터 시리즈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번 작에서의 프레데터는 흔한 지구 침공 외계인 A,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심지어 ‘인류의 구원자’라 여겨지는 어떤 프레데터가 작중 한 행동이라고는 주인공의 동료를 매우 잔인하게 죽이고, 군인들도 죽이고, 과학자를 공격한 것이 전부였다. 감독은 캐릭터와 시리즈에 대한 이해 없이 어설프게 선과 악을 나눠놓고는, ‘일단 프레데터가 사람들을 학살하면 다들 만족하겠지?’라고 안이하게 생각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 프레데터는 그저 슬래셔 영화를 찍기 위해 필요한 악당이자 ‘프레데터 시리즈’로 편입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혹은 <아이언맨>을 향한 감독의 남다른 애정을 드러내는 수단이던가.


왼쪽부터 맥키나, 네브라스카, 코일, 백슬리, 네틀스


두 번째로 그는 동성애를 도구화했다. 영화를 보는 동안은 눈치 채지 못 했지만, 주인공 맥키나와 함께 프레데터에 맞서 싸우는 코일과 백슬리는 커플이었다. 둘의 마지막이 꽤나 애틋하게 그려졌기에 다른 B급 영화들처럼 브로맨스를 활용한 코미디 연출이라고 생각하고 넘겼지만, 후에 둘이 영화 속에서 실제 동성애 커플이었다는 설정을 알게 되자 그 장면이 코미디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들은 성적인 농담과 욕설을 주고받는 악우처럼 그려지고 영화의 대부분에서 그들이 동성애자라는 언급이나 암시는 주어지지 않는다. 단지 ‘게이로드(gaylord)’라는 별명처럼 그들을 희화화하는 순간에만 동성애 설정이 이용된다. 물론 동성애도 이성애도 모두 재미있게 그려질 수 있다. 하지만 설득력 없는 아니, 설명할 노력조차 하지 않을 설정을 붙여가면서까지 영화 속에 동성애를 담아낸 것은 정치적 올바름을 지나치게 의식한 감독의 자기만족으로 느껴질 뿐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장애마저 스토리 진행을 위한 장치로 사용했다. 맥키나의 아들인 로리는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는 장애인이다. 같은 학교의 아이들에게 ‘Ass Burger(엉덩이 버거)’라는 멸칭으로 불리며 따돌림당하는 모습으로 처음 등장한 로리는 바로 직후, 반 아이들이 놓던 모든 체스 말들의 위치를 기억한 뒤 바닥에 떨어진 말들을 원래대로 돌려놓는 비범함을 보여준다. 이때 카메라의 구도와 웅장한 BGM을 통해 그의 능력은 더욱 강조된다. 로리는 이후 프레데터의 언어를 이해하고 그들의 기계를 다루는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의 주요 인물로 활약하는데, 영화는 이 모든 걸 ‘아스퍼거 증후군’ 한 마디로 설명하고 있다. 실제 아스퍼거 증후군 환자들은 특정 분야에 있어 비상한 기억력을 보이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오프닝 시퀀스의 체스 장면 자체가 현실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후 그가 보이는 만능에 가까운 능력들은 단순히 아스퍼거 증후군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오랫동안 ‘사용된’ 천재 서번트 증후군 장애인 캐릭터가 투영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아스퍼거 증후군과 서번트 증후군을 동시에 보이는 사람은 극히 드물며 대다수의 아스퍼거 증후군 환자들은 지적장애를 동반한 자폐증 환자와 비장애인의 중간 정도의 지능을 가진다. 때문에 매체에서의 ‘장애인 신격화’는 ‘장애인 약자화’만큼이나 위험하고 경솔한 표현이며, 이렇게 왜곡된 장애인에 대한 이미지는 그렇지 않은 대다수의 장애인들을 향한 멸시의 불씨로 작용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진화생물학자인 캐이시의 ‘진화된 인류’라는 표현은 장애인을 비장애인으로부터 분리시켜 그 사이에 우열을 만들어낸다. 영화 내에서 사용된 의도가 그렇지 않을지라도 스크린 밖에 만연한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장애인을 ‘덜 진화된 존재’로 왜곡시킨다.


동성애 캐릭터를 등장시키고, 장애인을 중요 인물로 설정했다고 해서 감독이 인권지킴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에게 셰인 블랙 감독은 자신에게 그러한 이미지를 씌우기 위해 정말 지켜야 하는 것들을 도구로 이용한 나쁜 감독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작중 인물들은 ‘프레데터’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들의 행동을 보면 포식자(predator)라기보다 사냥꾼(hunter)이다. 이건 프레데터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 말대로다. 이건 <프레데터>가 아니다. 감독의 자기만족 스페셜이지.

매거진의 이전글 인터넷 프라이버시의 현주소, <서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