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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Nov 04. 2018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나요, <청설>

마음은 소리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눈빛만 보아도 알아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정겨운 멜로디가 있다. 그 시절 TV를 켜면 항상 나오던 이 음악은 20년이 넘는 긴 기간 동안 모 초코과자를 정(情)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하게끔 했다. 서정적이고 따뜻하며 은근히 중독적이지만, 나에게는 이 광고가 어딘가 와 닿지 않았다. 사실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니……. 너의 목소리가 들리는 박수하도 아니고 평범한 사람에게 상대방의 마음을 꿰뚫어 본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상황에 따라 유추할 수는 있겠지만 과연 그것을 정말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지금보다 융통성이 부족했던 그때의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서로 마주 보고 앉아 모든 생각을 말로 전달하는 것만이 서로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믿었다.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더 많은 경험을 하며 언제부턴가 이해의 수단은 한 가지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말이 좋았다. 말로써 확인받고 싶었다. 내가 이해한 것이 맞는지, 그리고 상대가 나를 제대로 봐주고 있는지.



그러던 나에게 <청설>은 생각의 틀을 깨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영화에서 처음 10분은 그 영화의 주제의식과 캐릭터들을 관객에게 어필하는 시간이다. 최대한 관객들의 흥미를 자아내어 자리에 앉아있도록 하기 위해 주로 속도감 있는 편집과 빠른 음악으로 스토리의 템포를 힘껏 올려놓는 역할을 한다. 마치 첩보 영화에서 시작하자마자 주인공이 미션을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식으로 말이다. <청설> 역시 마찬가지이다. 두 남녀가 만나고, 작은 사건이 일어나며, 오토바이로 도심을 질주한다. 하지만 이 전형적인 오프닝 속에 <청설>만의 특징 또한 담겨있다. 바로 제목이 나올 때까지의 약 8분간 우리는 인물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후에도 영화 내내 주연들 간의 대화는 들리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는 볼 수가 있다. 영화는 음성대화의 부재로 인한 소리의 공백을 수화를 통해 메우며 이야기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오로지 소리에 집중해왔던 나에게 말뿐만이 아니라 손짓으로, 눈빛으로, 표정으로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물론 수화도 소리를 사용하지 않을 뿐 다른 음성언어와 마찬가지이므로 엄밀히 따지자면 두 사람, 티엔커와 양양이 대화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심지어 티엔커는 수다스럽다고 생각될 정도로 쉬지 않고 입과 손을 움직인다. 여기서 <청설>은 수화에 대한 나의 편견을 또 한 번 뒤집었다. 귀에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전혀 정적이지 않으며, 그들이 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마저 어느샌가 잊게 된다. 수화는 음성언어와 달리 음의 높낮이를 통한 어조의 변환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NMS(비수지신호, Non Manual Signal)라는 음성언어와 구별되는 특징이 존재한다. 표정이나 몸짓 등이 대표적인 비수지신호이다. 이처럼 등장인물들은 그들의 표정과 몸짓을 통해 감정을 함께 전달하기 때문에 설령 소리가 없다 할지라도 대화는 역동성을 지닌다. 마치 자막이 없더라도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영화에는 작고 귀여운 반전이 하나 있다. 티엔커와 양양은 서로를 청각장애인이라 생각했지만, 사실 두 사람 모두 소리를 듣고 말을 할 수 있었다. 청각장애인이자 수영선수인 양양의 언니, 샤오펑에게 도시락을 배달하며 처음 만난 두 사람이기에, 상대방이 자연스레 수화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 서로를 청각장애인이라 여겼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둘은 함께 있을 때에는 수화로, 그렇지 않을 때에는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에 이 작은 오해는 영화가 끝나기 직전까지 풀리지 않고 계속된다. 그러나 <청설>에서 이 반전은 단지 결말의 작은 해프닝을 연출하는 것에 모든 의의를 두지 않는다. 영화의 캐치프레이즈를 관객들에게 보다 감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이 반전의 진의라 할 수 있다.


사랑과 꿈은 기적 같은 일이다.
들을 수 없어도 말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한 번도 - 티엔커의 고백은 양양이 못 들을 것이라 생각한 혼잣말이었으니 - 좋아한다는 마음을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둘은 서로에게 이끌렸고 결국 사랑으로 이어졌다. 지금까지 나는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생각해왔다. 그럼에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영화는 착각 속에서도 꺾이지 않은 두 사람의 사랑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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