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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Dec 30. 2018

진짜 가족이 된다는 것, <미래의 미라이>

가족에서 '나'로, 그리고 다시 '가족'으로

‘가족’이라는 단어는 머릿속에 어떤 이미지로 그려질까. 나는 가장 먼저, 사랑하는 사람들과 테이블에 둘러앉아 맛있는 저녁식사를 하는, 마치 공익광고의 한 장면과 같은 모습이 떠오른다. 이는 비단 나 혼자만의 특이한 연상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세부적인 상황은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리는 가족의 이미지에는 모종의 유사점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든지 그들과 함께 웃고 있다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우리가 가족사진을 찍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이해가 쉽지 않을까. 세상에는 수많은 사진관과 사진가들이 있지만, 거실 벽에 걸려 있는 가족사진들은 대체로 유사하다. 왜 그럴까? 여권사진과 달리 가족사진은 정해진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우리 집과 다른 집의 가족사진은 비슷한 것일까. 그것은 분명 우리가 떠올리는 가족의 이미지가 서로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은 정의를 내리는 주체와 상황에 따라 다양한 조건들로 구분된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 민법에서는 자신의 배우자, 직계혈족 및 형제자매를 기본으로, 직계혈족의 배우자와 배우자의 직계혈족 및 형제자매를 생계를 같이하는 경우에 한해 가족으로 인정한다. 그렇다면 법과 무관하게 우리들의 인식에서는 어떠할까. 어디까지가 가족이고, 어디부터가 가족이 아닐까. 상술했듯이 법과 무관한, 어디까지나 관념적 범위에 대해서라면 답은 간단히 내릴 수 있다.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내 가족인 것이다. 가족을 논하는 데 혈연이나 증명서류는 필요하지 않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이 보여주었듯이 중요한 건 서로를 가족이라 여기며 소중히 대하는 마음이다.



<미래의 미라이>는 4살 소년 쿤에게 동생 미라이가 찾아오며 시작된다. 쿤은 새하얗고 자그마한 동생의 손을 잡으며 앞으로 함께할 즐거운 나날을 상상했지만, 이는 곧 마음 깊숙이 잠기고 말았다. 아직 갓난아기인 미라이는 부모의 손길을 쿤보다 더 많이, 더 자주 필요로 했고,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쿤은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 위기를 직감했다. 흔히 말하는 맏이의 설움을 느끼게 된 것이다. 동생을 질투하고 자신이 미라이의 오빠라는 사실마저 부인하던 쿤은 결국 ‘엄마 미워! 아빠 싫어!’를 외치며 때 이른 반항기에 돌입했고, 그 순간 미래의 미라이가 시간을 넘어 쿤에게 말을 걸었다. 이후 쿤이 미래에서 찾아온 미라이를 만나 겪게 되는 판타지적 경험들은, 우리가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며 한층 성숙한 어른이 되는 것처럼, 쿤을 ‘사랑받을 뿐인 존재’에서 ‘사랑을 나눠줄 수 있는’ 진짜 가족의 일원으로 성장케 한다.


중학생이 된 미래의 미라이를 만난 후, 쿤에게는 때때로 신비한 일들이 일어났다. 정원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과거와 미래의 가족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도깨비할멈처럼 화를 내는 지금의 엄마와 달리, 자신처럼 방을 어지럽히며 놀거나 군것질을 좋아하는 어린 시절의 엄마, 말을 타며 초원을 달리고 오토바이를 타며 바닷바람을 즐기는 증조할아버지, 그리고 미래의 미라이와 미래의 쿤 자신. 쿤은 모험 속에서 가족들의 알지 못 했던 일면을 보게 되고, 그들로부터 한 가지 한 가지 배워나간다. 남에게 부탁하는 법과 자전거를 탈 때의 요령, ‘나’ 이외의 가족들의 감정과 그들의 노력. 그러던 중 엄마와의 작은 갈등으로 쿤은 도망치듯 마지막 여행을 떠나게 된다.



마지막 모험에서 쿤은 ‘너는 누구냐’는 질문을 받는다. 물론 이는 당연하게도 쿤의 이름이 아니라 정체성에 대해 묻는 질문이다. 그런데 쿤이 답해야 하는 정체성이란 무엇일까. 나는 무엇으로 규정되는 것일까. 소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의 등장인물인 야마우치 사쿠라는 타인과의 관계가 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라 말했다. 즉, 이 사람도 아니고 저 사람도 아니고 그 사람도 아닌 단 한 사람이 바로 ‘나’인 것이다. 결국 나의 정체성을 찾는다는 것은 타인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누군가가 존재하고 그 사람이 나와 다르기 때문에 나는 나만의 아이덴티티를 지니게 된다. 쿤은 위의 질문에 ‘엄마와 아빠의 아이’라고 답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대답에 ‘애완견 윳코의 간식 담당’을 덧붙였으나 질문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또 다른 답을 요구했다. 나의 정체성이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형성된다면, 이때의 쿤의 세상에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윳코만이 존재했다. 사랑을 빼앗아간 미라이는 피가 이어져있을지언정 가족으로 받아들여지지 못 한 것이다. 만약 쿤이 시간여행을 하지 않았더라면 미라이와 쿤은 가족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몇 번의 모험 속에서 쿤은 가족들과 만나며 분명히 성장했다. 때문에 대답을 망설이다가도 미라이가 위기에 처하자 동생을 구하고 스스로 ‘미라이의 오빠’ 임을 외칠 수 있던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좋겠고, 나에게 먼저 달려와 주었으면 하며, 나를 가장 사랑해주기를 바란다. 쿤 역시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고픈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아이였다. 쿤뿐만이 아니라 이는 쿤의 부모님도 그러했다. 엄마는 말괄량이였으며, 아빠는 두려운 것들로부터 도망쳐 다니기 바빴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고 가족이 되며 그들은 변한 것이다.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고 배려하는 진짜 가족으로 그들도 성장했다. 마지막 여행에서의 질문처럼 나를 찾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정체성의 실마리를 따라간 그 끝에는 가족이 있음을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


항간의 평들처럼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 영화다. 하지만 쿤의 모험을 지켜보며, 가족의 소중함과 그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고 내 추억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렇기에 미워할 수 없는,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영화다. 영화를 본 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진앨범을 들여다보며 쿤의 모험처럼 이야기를 나눠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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