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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Jan 15. 2019

희망 가득한 세상으로, <언더독>

세상의 모든 '언더독'들에게

한 마리의 개가 있다.

주인과의 외출이 기뻐 연신 꼬리를 흔드는 모습은 커다란 몸집에도 불구하고 마치 소풍날 아침의 어린아이처럼 들떠 보였다. 개는 자동차 뒷좌석에 올라타 창밖으로 지나쳐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자동차는 아파트가 늘어선 도심을 벗어나 얼마간의 시간을 달려 나무가 우거진 산속으로 들어갔고, 구불거리는 산길을 따라 적당히 올라간 뒤 멈췄다. 개는 드디어 바깥의 흙을 마음껏 밟을 수 있었다. 딱딱한 아파트 바닥과는 다른, 흙과 낙엽이 주는 푹신함에 두근거림을 느꼈는지 왠지 더 기운이 넘쳐 보이는 것만 같았다. 어서 뛰어놀고 싶다는 개의 마음이 통한 걸까, 주인은 개가 가장 좋아하는 테니스공을 꺼내 멀리 던졌다. 어린 시절 함께 했던 ‘물어와’ 놀이처럼 개는 저 멀리 날아가는 공을 쫓아 달리고 또 달렸다. 바위를 넘고 나무 사이를 지나 떨어진 공을 찾은 개는, 기쁜 얼굴로 돌아오라 손짓하는 주인의 모습을 상상하며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그곳에 주인은 없었다. 무언가 이상한 마음에 주위를 둘러보자, 주인의 차는 산 밑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렇게 ‘또’ 한 마리의 개가 버려졌다.




영화는 오프닝에서 버려진 유기견 ‘뭉치’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뭉치는 폭우 속에서도 오매불망 주인을 기다렸지만 그의 앞에 나타난 건 사람이 아니라, 마찬가지로 주인에게 버려진 개들이었다. 폐허가 된 재개발 지역에서 살아가는 유기견들과 함께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뭉치는 떠돌이개로서의 삶을 배워나갔다. 먹을 것을 찾기 위해서는 쓰레기를 뒤져야 했고, 끊임없이 개장수(사냥꾼)로부터 도망쳐 다녀야 했다. 처절하고 위험천만한 삶이 계속되던 뭉치는 어느 날 철조망 너머 산 위쪽에 살고 있는 들개 가족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 만남은 뭉치에게, 인간이 남겨놓은 것들에 의지하는 현재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삶을 꿈꾸게 하는 계기가 되어 그를 여행의 길에 오르게 한다. 모종의 이유로 보금자리를 잃게 되는 유기견 그룹과 들개 가족이 삶을 포기하거나 단순히 도망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동물들의 천국이라는 ‘그곳’으로 향하게 되는 것은 뭉치의 선택과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뭉치 일행이 별 탈 없이 ‘그곳’에 도착해 마음 편히 뛰어다닐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여느 이야기들이 그러하듯 뭉치의 여행길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절망의 연속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영화는 뭉치의 발걸음을 따라 개공장이나 로드킬과 같은 사회문제들을 화면에 비춘다. 교배와 투견을 목적으로 개들을 소비하는, ‘절망’ 그 자체와도 같은 개공장의 실태는 뭉치 일행의 기억과 화면을 통해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이러한 개공장이 주인인 사냥꾼의 이익을 위해 운영되듯이, 뭉치 일행이 맞닥뜨리는 사건들은 모두 인간의 욕망으로 인한 것들이다. 자신들이 더 편리하게 이동하기 위해 습지를 가르는 도로를 내어 동물들의 이동을 막았으며, 일망타진을 노린다며 자랑스럽게 동물에게 위치추적 칩을 심었다. 사실 뭉치의 삶을 본다면, 탄생의 순간부터 이미 그는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으로 인한 절망의 늪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개공장에서 태어나 가격이 매겨져 판매되고 더 이상 주인이 즐거움을 느낄 수 없게 되자 무참히 버려지는 삶의 어디에 희망이 있을까.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이 늪에서 빠져나와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그곳’은 대체 어떤 곳일까? 그곳은 정말로 낙원인 것일까?



위험한 화약 냄새가 나는 철조망 너머의 그곳.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뭉치 일행이 향하는 ‘그곳’은 바로 DMZ(비무장지대)를 가리킨다. 인간에게 버림받고 상처 입은 개들은, 오로지 동물들만이 존재하고 인간은 들어갈 수 없는 곳을 바랐다. 이런 의미에서 DMZ는 그들의 희망에 정확히 부합하는 장소라고 생각될 수 있으리라. 우리가 실제로 품고 있는 DMZ에 대한 이미지도 ‘야생동물들의 낙원’이나 ‘멸종위기종의 보고(寶庫)’처럼 자연친화적인 연상이 강하니 말이다. 하지만 이곳의 실제 모습은 어떠한가. 전쟁의 잔재인 지뢰가 곳곳에 묻혀 있으며, 위아래가 철조망으로 가로막혀 세로 길이는 고작 4km에 불과하다. 이곳에서 뭉치 일행은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까? 그들이 쟁취한 자유는 오로지 철조망 내부에서만 누릴 수 있는 자유다. 마음대로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그곳은 단지 ‘조금 더 큰 우리’일 뿐이다. 비록 영화에서 개들은 DMZ로 들어가려 했고 사냥꾼과 군인 등 인간들은 그들을 막는 존재로 그려졌지만, 실상 인간이 그들을 우리 속으로 몰아넣은 것과 다르지 않다.



‘언더독(Underdog)’은 ‘약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영화 속에서 약자로 그려지는 캐릭터들은 당연 뭉치 일행이다. 약자들은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기 위해 낙원을 원했으나, 낙원이라 믿었던 그곳은 감옥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으로부터, 강자들로부터 격리되어 세상과 단절됐다. 왜 약자들의 낙원은 철조망 너머 그 속에만 존재하는 걸까.


영화의 후반부에는 숲 속에 살고 있는 한 부부가 등장한다. 아픈 동물들을 치료해주고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은 절망 가득했던 영화에 한 줄기 희망으로 비쳤다. 어쩌면 진짜 낙원은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그곳’이 아니라 ‘이곳’이지 않을까. 더욱 많은 강자들이 약자와 함께 걸으려 한다면, 세상은 이 부부가 사는 곳처럼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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