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에서 자주 보이는 그 단어, 그 이면의 이야기
"단순히 클리셰를 따랐을 뿐인 졸작이다."
"클리셰 덩어리의 진부한 영화였다."
"뻔한 클리셰로 가득하다."
포털 사이트나 별점 어플 등에서 영화 리뷰를 읽다 보면, 유난히 자주 보이는 단어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영화를 비판하는 경우에 자주 쓰이는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신파'와 '클리셰'이다. 하도 많이 쓰이다 보니 이제는 기사나 블로그의 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단어들이 되어 그 뜻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는 않겠지만, 혹시 이 단어들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지는 않은가? 적어도 나는 그랬다. 언제나 이 단어들을 굉장히 나쁘고 안 좋은 것으로 생각했으며 그런 관점으로 영화를 보고 글을 적어왔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그렇게 나쁘고 안 좋은 거라면 왜 저런 평을 듣는 영화가 계속 나오는 걸까? 글을 쓰다 갑자기 떠오른 의문에 답하는 겸, 이번에 잠시 클리셰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클리셰(Cliché). 알파벳 'e' 위에 이상한 게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영어는 아니고 유럽 쪽, 정확히는 프랑스로부터 온 단어다. 본래는 윤전기에 걸어 신문을 찍는 활자판인 '연판'이라는 의미지만, 미리 양식대로 만들어놓았다는 점에서 현재 평론에서 쓰이는 '진부하고 틀에 박힌 표현'의 의미로 발전되었다. 쉽게 말해 '영화가 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도 뻔한 영화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기껏 돈과 시간을 투자했으니 그에 걸맞은 재미와 감동을 원하는 것이 당연지사이니 말이다.
잠시 식당으로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그 식당만의 독창적인 전문 메뉴, 통칭 '스페셜리티'가 있는 곳에 흥미를 가진다. 큰 마음을 먹고 외식을 하러 갔다면, 다른 곳에서 먹는 것과는 다른, 바로 그 식당이 가장 맛있게 만들 수 있는, 그런 요리를 먹고자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세상에 식당은 너무나도 많고, 그중 대다수는 '전문점'이라기보다는 '김X천국'과 같은 곳이다. 물론 그 모든 비(非) 전문점들이 각자의 스페셜리티를 가질 정도로 음식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그들은 전문성보다 편의성과 보편성을 추구했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레시피를 개발하기보다는 대중의 입맛에 맞는 검증되고 일반화된 레시피로 익숙한 맛을 내어, 고객층을 넓히고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하려 한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의 비즈니스 전략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1년에 개봉하는 영화의 수는 어마어마하다. 2019년 1월부터 11월까지 개봉한 국내 영화만으로도 실질 개봉작(극장 개봉하여 40회 이상 상영된 작품)의 수가 173편에 달한다. 약 440편의 형식적 개봉작(이라는 이름의 성인 영화)과 1,000편 이상의 외화들을 제외하더라도, 제작자에게 있어 172명의 경쟁자들은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한국의 1인당 연평균 영화 관람 횟수가 2018년 기준 약 4.2회이니 자신의 영화가 관객에게 선택될 확률이 대략 2.43%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실험적 상황에서의 이야기고, 실제로는 비수기와 성수기, 해외 영화들과의 경쟁, 출연진들의 티켓파워나 관객들의 입소문 등 다양한 변수가 존재한다. 때문에 어느 영화는 천만의 선택을 받게 되고 어느 영화는 십만의 선택조차 받지 못하는 결과가 나타나고 말이다.
여하튼 요지는 영화 제작자에게 있어 관객들의 간택을 받기란 결코 여유로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화 산업은 막대한 자본이 오고 가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구조로 돌아가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투자의 불확실성을 줄이는 것이 중요시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실패 확률을 최소화할 수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위에서 언급한 각종 변수들을 그대로 뒤집어서, 디즈니 영화들 같은 해외 대작과의 경쟁을 피하고, 인기 있는 배우들을 캐스팅하며, 열심히 광고하여 조금이라도 소식을 널리 퍼트리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모날 가능성 없는 원만하고 대중적인 이야기가 꾸준한 소비로 이어진다.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이미 검증된 길을 걷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고 안전하다. N차 관람이 하나의 문화가 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미디어 콘텐츠의 가장 큰 특성 중 하나는 소비의 비반복성이다. 같은 영화를 비용을 지불하고 다시 보는 경우보다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소수인 특정 마니아 집단보다는 대중을 겨냥하는 쪽이 더 많은 티켓 매출을 올리기에 효과적이다. 즉, 식당의 예시와 마찬가지로 클리셰를 따르는 것은 하나의 전략이라는 것이다.
왜 전문점의 간판 메뉴를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가 아니라 '스페셜리티(speciality)'라고 할까? 두 단어의 의미는 유사하지만 전자는 후자에 비해 '고유하다'는 의미가 더욱 강조된다. 그 식당의 간판 메뉴를 보면, 분명 다른 곳과 차별화된 특별한(special) 포인트가 있지만, 그 기원(origin)은 다른 곳에서도 찾을 수 있다. 결국 기반이 되는 무언가, 클리셰라고 부르는 무언가에 자신만의 스파이스를 더한 것이 스페셜리티가 되는 것이다.
영화의 역사는 벌써 100년을 넘겼으며, 그 사이에 웬만한 이야기들이 다 사용되어 수많은 클리셰들이 생겨났다. '클리셰 비틀기'조차 이제는 진부하다고 여겨진다. 물론 그런 상황 속에서도 변화를 멈추지 않고 새로운 재미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투자자들의 압박에서 벗어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영화라는 상품은 매출을 이끌어내야 하고, 그렇게 점점 안전지향주의 영화들이 늘어난다. 하지만 그들이 모험하지 않는다고 해서, 노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영화의 질을 떨어트릴 정도로 과도하고 무의미한 클리셰 따르기는 비판해 마땅하지만, 단순히 전형적이라는 이유로 영화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 속에도 꽤 많은 재미가 담겨 있을지도 모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