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도 수백 번, 아니 어쩌면 수천 번씩 마켓의 문은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한다. 그럴 때마다 마켓에서는 안녕하세요와 안녕히 가세요가 뒤섞이며 묘한 공명을 자아내고, 거기에 심심찮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추임새를 넣는다. 한 톤 높인 목소리. 밝은 미소와 공손한 어투. 사회인이라면 누구에게나, 특히 고객을 응대하는 서비스업 종사자들에게는 더욱이 요구되는 인사 예절의 기본이다.
당연히 인사가 다가 아니다. 별거 아닌 일에도 감사합니다와 죄송합니다를 잊어서는 안 되고, 간혹 찾아오는 시험의 순간에도 감정을 추슬러야만 한다. 이른바 '감정노동'이라는 걸 자신이 하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적당히 눈치 보고 적당히 분위기 파악하던 이전까지와 달리, 보다 적극적으로 스스로의 표정과 말투를 다스려야만 했다.
걱정과 달리 어려움은 많지 않았다. 이용자분들로부터는 친절하다거나 감사하다는 말을 들었고, 주임님께서도 잘하고 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마음에 긍정 에너지가 솟아났었다. 복지시설의 특성상 대부분의 이용자분들이 어르신이시고, 푸드마켓 선정 기준에 따라 그중에서도 어려운 환경에서 생활해온 분들이 많으시다. 때문에 다소 답답한 상황도 생기고 때로는 진상이라 불러 마땅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최대한 그분들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무언가 사정이 있으시겠거니, 구태여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업무만 시작되면 나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근무 중이 아닐 때에는?
직장 밖, 집에서의 내 모습은 어땠을까.
내가 이곳에서 일을 시작하며 가장 먼저 떠올렸던 것은 우리 할머니였다. 여느 맞벌이 가정처럼 나는 할머니 손에 자랐고,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받지 못할 정도의 큰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내가 일어날 시간에 맞춰 매일 아침 상을 차려 주셨고, 언제나 잘 다녀오렴 그리고 다녀왔니?를 빼먹지 않으셨다. 생각해보면 할머니는 나에게 세상 그 누구보다, 어쩌면 부모님보다도 더 많은 사랑과 이해를 보여주셨고, 지금도 여전히 보여주고 계신다.
그런데 내가 마지막으로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한 게 언제였더라.
잘 다녀왔습니다는 또 언제였지.
할머니 손을 잡고, 꼬옥 안아드린 건 또…….
고작 하루 9시간에 불과하지만 감정노동이라는 걸 해보고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몇십 년을 넘게 가족의 곁에서 웃음을 잃지 않은 진짜 감정노동자가 바로 옆에 계셨다는 것을. 할머니. 아마 할머니는 당신의 일생을 노동이라 부르지조차 않으시겠지. 그저 그것이 사랑이라고 말씀하실것이다.
그에 반해 나는 그런 할머니께, 처음 보는 사람에게 보다도 못한 모습을 보여왔다. 더 밝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더 따뜻한 기억을 안겨드리지는 못 할 망정 말이다. 가까워서, 편해서 그랬다는 건 변명에 불과하다. 사랑한다면 그 마음을 표현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러지 못해 왔다면,때로는 가족도 남이라고 생각하자. 적어도 남들에게 갖는 만큼의 이해와 남들에게 보여주는 만큼의 미소와 남들에게 향하는 만큼의 호의는 갖도록 노력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