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Veni Jun Sep 26. 2021

때로는 역사를 잊어야 미래가 보인다

혐오의 시대에서 탈피하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한국사 문제집을 넘기다, 문득 이 말이 떠올랐다. 한때 이 방송 저 방송을 휩쓸며 한국 문화계에 역사 열풍을 몰고 왔던 하나의 문장. 누가 남기고 간 말인지 그 출처는 불분명했지만, 그럼에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묘한 힘이 실린 말이었다. 그런데 정말,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되는 걸까? 우리는 지나온 과거로부터 선조들의 감정을 계승해야만 하는 걸까?


역사란 결국 누군가가 남긴 기록이다. 때문에 하나의 사건이라도 하나의 역사가 아니라 그것을 기록한 사람들의 수만큼 다양한 역사가 존재하게 된다. 승자에게는 승자의 역사가. 패자에게는 패자의 역사가. 역사들끼리도 감정을 갖고 전쟁을 한다. 그리고 그것들의 싸움 또한 그 자체로 역사가 되어 우리에게 이어져온다.


흔히들 역사로부터 교훈을 구하고 지혜를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데, 우리는 지금 과연 무엇을 얻고 있을까. 승자의 역사는 우월감과 자만을, 패자의 역사는 끝없이 들끓는 분노를. 어쩌면 우리는 그저 왜곡된 애국심과 서로를 향한 깊은 혐오만을 얻고 있던 걸지도 모르겠다.




나라에게 역사가 있다면, 그 속의 우리에게는 각각의 기억이 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겪은 모든 일들이 곧 우리의 역사가 된다. 나의 역사는 패자의 역사다. 병신의 역사다. 과거의 아픔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즐거웠던 추억들은 놓아주더라도 괴로웠던 악몽들은 결코 잊지 않았다. 그렇게 내 기억에 아픔만을 남겨왔다.


사람들은 나를 걱정했고, 내게 이제는 그만 흘려보내라고 이야기했다. 고마웠고, 답답했다. 나도 그게 옳다는 걸 아는데. 그래야 한다는 걸 알았는데. 그 아픔을 잊고, 가득했던 분노가 다 식어버리면, 텅 비어버릴 내 모습이 너무나 두려웠다. 분노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내 몸을 움직여줄지. 그 기억들이 뿜어내는 검은 연기에 지금의 나까지 병들어 갔음에도, 나는 나의 역사를 잊지 않았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하지만 역사에 매달린 끝에도 미래는 없었다. 과거의 감정에 묶여 언제까지고 제자리걸음을 반복할 뿐이었다. 우리는 지금 혐오의 시대에 살고 있다. 분노는 우리를 움직이는 가장 원초적이고 강력한 감정이기에, 우리는 계속해서 분노할 대상을 찾고 기억하고 되새기며 서로의 혐오를 겨루어 왔다.


나 역시 여전히 어제의, 그제의, 지난달의, 10대 때의 감정들을 꺼내보며 자꾸만 과거를 이어가려 하고 있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이제는 미래의 행복이 그려지지가 않더라.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많은 과거를 다 흘려보낼 수 있을지조차 모르겠다. 그래도 이대로는 또 역사를 되풀이하고 말겠지. 언제까지고 혐오의 시대가 계속되고 말겠지. 그러니 조금씩은 역사를 잊어나가 보자. 그래야 또 새로운 미래를 적을 수 있게 될 테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