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Veni Jun Dec 05. 2021

소리 없는 아우성

집에 나 홀로 남게 된 지도 반년을 지나 벌써 9개월에 가까워지고 있다. 마치 날짜를 다 알고 있는 듯 적어놓긴 했지만, 사실 그 시작이 언제부터였는지는 제대로 기억나지가 않는다. 어쩌면 진즉에 9개월을 지났을지도, 아니면 아직 한참이나 남은 먼 미래의 일일지도 모르겠다. 기억이 어렴풋해, 그저 날씨가 아직 따뜻했다는 감각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달력에 표시라도 해놓을 걸. 누군가 알려주는 사람이 없으니 이젠 내가 기억해야만 할 텐데.


내가 외동으로 자라서인지, 아니면 그저 남들과 어울리는 걸 꺼려했기 때문인지. 수다쟁이였던 나는 혼잣말이 많았다. 아니, 정확히는 혼자 대화라고 해야 할까. 내가 묻고 내가 답하며 내가 재촉하고 내가 사과했지만, 그것은 분명 주고받음이 있는 대화였다. '또 하나의 나'나 '상상 친구' 같은 외부의 대상이 없었을 뿐, 대화의 주체가 모두 나 자신이었을 뿐. 고민하거나 결정해야 할 때에는 언제나 입을 열고 스스로와 대화하곤 했었다.


타인과의 대화는 피곤했다. 싫어하는 사람과의 대화는 그 자체로 귀찮고 짜증 났으며, 좋아하는 사람과의 대화에선 혹여나 실수를 저지를까 살피고 긴장해야만 했다. 결국 어느 누구와의 대화로도 편해질 수는 없었다. 저 사람이 내 시간을 얼마나 빼앗아갈지, 오늘의 이 기분을 어디까지 망가트려줄지. 혹은 내가 저 사람의 시간을 붙잡고 있는 건 아닐지, 저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해버리진 않을지. 그 모든 스트레스로부터 피하기 위해선 입을 다물고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되돌아보면 이 또한 결국 나의 이기심 때문이었다. 그저 말하고만 싶었다.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막연히 그들로부터 지지받고 싶었다. 가만히 듣고 있기보다는 나의 일상을, 나의 꿈을, 내가 가진 신념과 입장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대화란 그런 것이 아니기에. 내게 있어 타인과의 대화는 원하든 원치 않든 부딪힘의 연속이었다. 마음을 놓고 쉴 수 있는 곳은 오직 내 방뿐이었다.


이제는 집이 곧 내 방이 되었다. 나 말고는 아무도 남지 않았으니까. 아무도 남아있지 못하게끔, 그렇게 만들어 버렸으니까. 처음에는 달라진 게 없었다. 생활 속 마주치는 고민들에 나는 여전히 소리 내어 스스로를 찾았고, 여느 때와 같이 나는 혼자 대화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방 밖의 누군가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됐기에, 아침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머릿속의 모든 생각들을 털어놓았다.


그런데 오늘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언제부턴가 생각도, 고민도, 대화도 전부 머릿속으로 하고 있구나. 입을 열지 않았다. 온 집안이 고요했다. 수도관의 물 흐르는 소리, 바깥 도로의 오토바이 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올 뿐, 대화의 목소리는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머릿속으로는 계속 말들을 쏟아내면서, 잠시 가만히 정적을 느꼈다. 갑자기 알 수 없는 답답함이 피어났다. 이유도 모른 채 그저 답답해했고, 이윽고 답답함이 불안으로, 불안이 공포로 순식간에 번져 올랐다.


입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슨 말이든 좋으니 입 밖으로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답답함을 빨리 깨버려야만 했다. 하지만 입은 벌어지지 않았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모르겠다. 이제는 마음 편히 말할 수 있게 됐는데. 왜 나까지도 조용해져 버린 걸까.


나는 고요함이 좋다. 혼자인 게 편하다. 시끄러운 곳에서는 집중할 수 없고, 다른 사람 앞에서는 긴장을 풀 수가 없다. 지금이 딱 내가 바라던 바로 그 환경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왜...

모르겠다. 잘 모르겠다. 정말로 모르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