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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Dec 27. 2021

2021년, 극장 부활의 신호탄

영화 연말 결산 - 해외 Best 15

지금쯤이면 다 끝나 있을 줄 알았다. 이 팬데믹이 다 지나갔을 거라 생각했다. 작년 이맘때에는 그런 가느다란 희망을 보고 있었다. 백신이 개발되면 끝나겠지, 접종이 완료되면 끝나겠지. 하지만 코로나19에 종착역은 없었고, 어느샌가 부스터 샷이라는 추가 레일 위를 우리는 또 열심히 달려가고 있었다. 3차 접종을 끝내고 왔지만 앞으로 몇 차례의 추가접종이 더 필요하게 될까. 앞으로 얼마나 더 이 위기 속을 살아가야 할까.


그러한 피로감에 한 동안은 무언가를 즐길 엄두조차 나지가 않았었다. 극장을 갈 수가 없었고, 영화를 볼 수가 없었다. 그저 천장을 바라보며 마음에 여유가 돌아오길 기다릴 뿐이었다. 봐야 하는데, 봐야 하는데 하며 많은 영화들을 흘려보내다 보니, 어느새 달력은 절반이나 넘어가 있었다. 


그랬던 내가 하반기에는 다시 극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나뿐만이 아니다. 올해 하반기는 상반기에 비해 1.5~2배 가까이 관객수가 늘어났더라.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극장을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떻게 우리 모두가 극장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걸까. 마블 덕분일까? 물론 무시할 수 없으리라. 1년에 3편씩 찾아오던 MCU가 6개월 사이에 4편이나 쏟아졌으니 극장에 쉴 틈이 없었겠지.


하지만 결코 오직 마블 때문만은 아니다.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이유는, 큰 영화와 작은 영화, 예술 영화와 상업 영화를 막론하고 너무나도 훌륭한 작품들이 극장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내가 우울과 무기력함에 묻혀 있던 사이에도 누군가는 꿋꿋하게 이토록 멋진 작품들을 만들어왔던 것이다. 포기하지 않았던 그들이 있었기에, 극장 역시 잠시 반짝하고 꺼지는 게 아니라 꾸준하게 그 빛을 이어갈 수 있었다. 아직도 팬데믹의 끝은 보이지 않지만, 그 모든 결실들이 모여 극장 부활의 신호탄은 쏘아 올려졌다. 그렇다면 시네마의 빛을 본 우리는, 적어도 나는, 내년에도 쭉 극장을 오갈 수 있지 않을까.



해외 Best Top 15



Top 15. <올드>

-마음이 쫓아가지 못할 정도로 죽음을 향해 달려가버리는 육체. 덧없음과 공허함, 그리고 그 속에 묻혀 잊고 있던 동심이 벅차올라 나도 몰래 눈물이 흘렀다.


Top 14. <베네데타>

-기적이 실재하는지, 신이 정말 우리를 지켜보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독실한 성녀인지 타락한 광녀인지를 결정하는 건 사탄을 품고 사는 우리 인간들이니까.


Top 13. <바쿠라우>

-누군가가 정한 선 따위는 무시해버릴 정도의 강렬한 에너지로 정의를 집행한다. 하지만 그 정의마저 판타지가 되고 마는 현실에 안타깝고 먹먹해진다.



Top 12. <포제서>

-자아의 실존을 놓고 벌어지는 정신의 주도권 경쟁. 기억을 이어받고 육체를 강탈하면 그 사람은 내가 되는 걸까? 소름 돋는 결말과 함께, <항생제>에 이어 감독이 보여줄 다음 대체 현실이 기다려진다.


Top 11. <노매드랜드>

-함께 노력해서 이겨내자는 동화적인 위로 대신, 그럼에도 살아가는 사람들이 건네는 자유롭고 여유로운 한 마디가 더 큰 힘이 될 수 있음을. 클로이 자오 감독이 담아낸 광활한 풍광은 그 자체로 경이롭고 따스하다.


Top 10. <미나리>

-눈물샘이 고장 난 것처럼 쉼 없이 울고 또 울었다. 할 수 있었음에도, 알고 있었음에도 하지 않았던 당연함이 '미나리 가족'에게는 있었다. 감사하는 것, 존중하는 것, 대화하는 것. 참으로 이기적인 나였구나.



Top 9. <라스트 나잇 인 소호>

-초창기 작품들의 향은 많이 날아가 버렸지만, 여전히 황홀한 순간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에드가 라이트만 한 감독이 없다. 악몽과도 같은 현실과 현실이 되어가는 악몽 속의 두 주인공. 하지만 악몽에도 혼자가 아니라면.


Top 8. <파워 오브 도그>

-서부극을 싫어하는 나까지도 사로잡은 그들의 카리스마와, 숨 쉬기 힘들 정도로 조여 오는 캐릭터의 트라우마. 완벽하게 짜인 영화의 구조가 마지막 몰락의 카타르시스를 극대화한다.


Top 7. <퍼스트 카우>

-지배와 정복이라는 개척시대의 가치관, 문명과 함께해온 기계론적 자연관을 뒤집으며, 차별을 뛰어넘고 폭력을 거두는 수정주의적 해법을 제시한다. 모든 것이 나와 너의, 우리와 그들의, 인류와 자연의 우정으로 이어져있음을.



Top 6. <쁘띠 마망>

-참으로 가까이에 있는, 누구나가 떠올릴 수 있는. 하지만 정작 우리의 일상에선 이루어지지 못했던 말들. 셀린 시아마 감독의 영화들이 따스한 이유는, 그들의 눈과 귀와 입이 서로를 향해 열려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Top 5.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마블이 보여준 또 하나의 신화, 또 하나의 가능성. 스파이더맨 서사의 완성이자 새로운 시작. 동시에 탈진실 시대를 그대로 투영해, 미디어가 얼마나 악랄한 빌런이 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경고한다. 영웅에게 배우는 진실의 무게.


Top 4. <티탄>

-처음과 끝의 분위기를 완전히 부딪히게 만들면서도, 그 모두를 아우르는 이야기의 유려함이 놀랍다. 사탄의 탈을 벗고 예수가 되기까지.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마치 순례길을 걸은 듯한 거룩함이 마음속에 가득해진다.



Top 3.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동화 같은 만남도, 현실 속의 이별도. 그 사이의 감정들까지 모두 아름답도록 애련하게 그려냈다. 최근 그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었던, 진실로 우리에게 필요한 만남과 이별의 영화.

순전히 내 마음을 울린 정도로만 따지자면, 이 영화는 1위 그 이상임에 틀림없다.


Top 2. <아네트>

-장르의 경계를 넘고,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넘는다. 영화의 인트로부터 아웃트로까지 놀랍도록 신선한 충격의 연속이었다. 뮤지컬 영화가 이토록 현실적일 수 있다니. 누구도 사랑할 수 없고, 누구도 사랑해서는 안 된다. 심연에 발을 담근 채로는.



Top 1. <그린 나이트>

-예고된 죽음이라는 운명 앞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로 삶을 살아야 하는가. 숨거나 도망치는 것, 공포를 잊기 위해 쾌락에 빠지는 것, 객기를 부리며 무작정 달려 나가는 것. 참으로 인간적이지만 무엇 하나 올바르다고는 할 수 없다. 진정으로 용감하고 진정으로 명예로운 기사의 삶이란, 죽음이 올 것을 받아들이고 그 각오를 지닌 채로 삶에 충실한 것이 아닐까. 카메라 워킹 만으로 관객을 압도하는 이 놀라운 걸작이 우리에게 전하는 건 분명 이러한 마음가짐이리라.

내게 올타임 레전드로 기억될, 위대한 작품이었다.




처음 다시 극장에 돌아갔을 때만 해도, 과연 연말 결산을 진행할 수 있을 정도까지 내가 영화를 볼지가 걱정이었다. 그러나 하반기 극장가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걸작들의 향연이었고, 그 싫어하는 OTT에도 가입해서 지나간 작품들까지 챙겨보고 나니, 이젠 순위에 올릴 작품이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이 호조가 내년에도 계속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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