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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벤선생 Jun 11. 2023

모으기의 힘

Christo and Jeanne-Claude 전시 오프닝을 보며

어린 시절 내 주변 많은 어른들이 우표 모으는걸 취미로 가졌었다. 작은 종이 조각을 정성스레 모으는 행위가 내 안의 여러 가지 호기심을 휘저었다. 애초에 뭔가를 모으고 오랫동안 보관하는건 각별한 노력이 필요한 일이니 신기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러다 미국에 건너가 살게 되면서 주마다 다른 쿼터(25센트짜리 동전)가 내 손에 들어오는 것의 즐거움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고, 쿼터 컬렉션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발행된 모든 쿼터를 모으진 못했지만, 청소년기쯤 무언가를 모으는 것의 재미를 처음으로 어렴풋이나마 맛보았던것 같다.


어제 이아 서울(IAH Seoul)에서 크리스토와 잔-클로드 전시 오프닝이 있었다. 이 커플은 공공 건축이나 대자연을 천으로 감싸는 래핑 작업으로 잘 알려져있다. 거대한 천으로 대상을 포장해 시각적인 인식을 차단시키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그것의 부재를 더 확고하게 드러냄으로써 존재감을 부각시킨다. 한 지역의 랜드마크가 되는 건물이나 자연을 천으로 뒤덮기 위해서는 수많은 법적, 행정적 절차와 설득에 설득을 거듭해야 했다. 이 과정 모두가 그의 장소 특정적이고 한시적인 작품에 녹아들어간다.


1935년 불가리아에서 태어난 크리스토는 소련군의 점령을 피해 1956년 유럽 국가들로 망명한다. 이후 자유와 저항은 그의 예술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전시 리플렛의 설명을 빌리자면 그는 일체의 후원/투자를 거부하고 자신의 창작물(드로잉, 콜라주, 판화, 도록 등)을 판매한 수익으로만 재원 조달을 했는데, 이는 '개인을 억압하는 권위에 도전하고 예술가의 창작 의지를 불태우는 변화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유작은 2년 전 파리 개선문을 포장한 작업이다. 개선문 앞을 지나가는 누구나 작품을 만져보고 느껴볼 수 있게 했다. 예술은 누구든 즐길 수 있는 것이라는 작가의 염원이 60년만에 이루어진 감개무량한 프로젝트였다.


L'arc de Triomphe, Wrapped, 1961-2021


갤러리에는 100여점의 드로잉과 오리지널 프린트, 작가의 삶과 작업을 조명한 30여권의 책이 비치되어 있다. 놀라운 점은 이 모든 작품이 대표님의 소장품이라는 것과, 크리스토와 잔-클로드 재단의 공식 협조 하에 기획된 전시라는 것이다. 그 덕에 Christo and Jeanne-Claude의 공식 폰트를 초청장과 전시장에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 이 많은 작품을 컬렉팅하셨냐고 여쭤보니 약 10년 이상 끈질기게 작품을 찾아 모으셨으며, 그 과정에서 재단과도 점차 가까워졌다고. 액자를 제작할 때도 재단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소재 및 매트 사이즈를 조율하셨다고 했다. 그래서 기존과는 사뭇 다른 태도와 애정을 가지게 되는 전시라고 하신다.


십년 넘게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나의 보물들을 모두 꺼내어 공개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 나도 직접 예술 공간을 운영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직까지 이렇다할 컬렉션의 주제나 규모를 갖추진 못했다. 왜 마음에 드는 건 항상 다 비싸고 구하기 어려운지. 뭐든 주제나 스토리가 있어야하는데 그걸 의식하면서 컬렉션을 만들려고 애쓰다보면 결국 내가 진정 원하는게 무엇이었는지는 까먹어버리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투자성이 좋은 블루칩 작가. 힙하고 트렌디한 잘 팔리는 젊은 작가. 아니면 엄청 독특하고 실험적인데 뭔가 모르게 마음이 가는 작가. 내 공간의 방향성을 세팅하면서 가장 많이 고민한 부분이기도 하다.


정답을 찾기란 늘 어렵고 그것은 아주 좋은 핑계가 되어 나를 더 게으르게 만든다. 하지만 어제 이아 서울 대표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녀의 열정과 끈기에 크나큰 자극을 받았다. 좋아하는걸 모으는 것이 얼마나 큰 가능성들로 이어질 수 있는지. 또 어제 오프닝에서 만난 다른 많은 갤러리스트와 예술가들로부터도 긍정적인 기운을 얻었다. 모으고, 기록하고, 공유하면 어디로든 연결되는 시대 아닌가. 지금 내가 가는 방향으로 더 열심히 노를 저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멋진 업계 동료들이 있어 기분 좋고, 부럽고, 내가 작아지기도 하는 기분이다. 위축되어 작아지는 거라기보단 나의 세계가 더욱 확장되어 내가 얼마나 작은지 더 잘 보이게 되는 느낌. 이래야 내가 더 많이 배우고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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