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국제도서전 '비인간, 인간을 넘어 인간으로'
지금 전세계적으로 예술계와 문학계는 인간 중심적인 사고방식에 대해 자문과 반성의 파도를 타는 것 같다. 적어도 이틀에 한번씩은 인류세와 툴루세라는 단어와 맞닥뜨린다. 올 봄 호기롭게 도서관에서 '해러웨이 선언문'을 빌려왔지만 나의 짧은 식견으론 몰입해 읽기가 어려웠고 하는 수 없이 반려견과 관련된 부분만 들춰보곤 반납해버렸다. 하지만 해러웨이 선언문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움직임을 알아채기에 충분했던 것은 요즘 유독 '월든', '철학자와 늑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와 같은 책들이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고 있고, 이들은 공통적으로 인간이 자의적인 잣대로 자연을 판단하고 규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이후 인간은 정복의 역사를 써왔다. 타인의 노동력과 시간을 거머쥐고, 주변 환경과 자연을 지배했다. '혹시 그 과정에서 우리가 놓친게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될 때까지 약 200년이 걸린 셈이다.
현상황의 심각성을 되돌아보려는 시도는 비단 문학에서뿐만 아니라 예술계로도 이어지는데, 현대 미술에서는 우월한 예술(시장성이 높은, 서구가 이끄는)과 그렇지 않은 것들로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에 제동을 가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이는 식민주의에 대한 반성을 통해 시작된다. 서양 중심의 제국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 소수 민족, 디아스포라, 사회적 약자 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지난 몇 년간 예술계에서 지배적인 주제로 떠올랐다. 여성 작가, 흑인 작가 등이 빠르게 부상하는 것은 이런 배경도 기여하는 바가 크다. 테이트 모던의 이숙경 수석 큐레이터가 이끄는 '트랜스내셔널' 프로젝트들이나, 작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스칸디나비아관 대신 공개된 사미관(북유럽의 소수민족인 사미족의 예술을 선보임) 등은 그전까지 소위 고급이라 일컬어지는 예술과 비교되어 열등하다고 치부되었던 집단의 예술을 집중 조명했다. 같은 지구인 혹은 하나의 인류 공동체로서 타인을 바라보려는 노력이다. 이는 세월과 함께 자연스레 사라질 수도 있었던 한 도시, 한 공동체의 자연과 문화유산과 전통을 돌보고 지켜가려는 결의를 담고 있다. 타인을 존중하고 다양성을 환영하는 태도야말로 예술이 우리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최고의 각성일 것이다.
어제 서울국제도서전이 열렸다. 오후에 최재천 교수님의 강연 '그들은 우리를 보고 있다'를 들으러 다녀왔는데, 동물과의 공존을 고민하는 생물학자가 이번 도서전의 주제 '인간과 비인간'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할지 궁금했다. 따뜻하고 강단 있는 어조로 그는 천천히 인간과 동물의 진화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기후 변화로 인해 야생 동물과 인간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그 어느 때보다 좁혀지면서 코로나 같은 바이러스에 인류가 더욱 취약해졌다는 사실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에코 백신의 개념을 제안했다. 같은 주제로 2022년 베니스 비엔날레 기조연설도 하셨다고 한다. 나는 심지어 작년에 베니스 비엔날레를 다녀왔는데도 그가 기조연설을 했다는 것은 어제 처음 알게 된 사실이라 조금 부끄러웠다.
그가 강연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핵심은 자연과 동물은 우리의 존재를 모를 리가 없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경고다. 그는 1만년 전 농경사회가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즉 홀로세 기간 동안 인간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포식자로 떠오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단적인 예를 들어주었다. 1만년 전,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과 인간이 기르는 가축의 중량을 합친 무게는 지구 전체의 생명체 무게 총합의 단 1%만을 차지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그 수치가 99%에 육박한다고 한다. 80억 인구에 반려 동물들, 공장식 축산업 아래 길러지는(아니 생산되는) 수많은 가축들과 동물원에 가둬진 개체들까지도 포함한 수치다. 이제는 지구상에 인간의 손길이 뻗지 않은 곳을 찾기가 어렵고, 그 대가로 생물 다양성이 속수무책으로 희생되어 온 것이다. 공장식 축산업은 동물을 대하는 윤리적 관점에서 보아도 문제가 많고, 기후 변화의 가장 큰 주범이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그들을 기를 농장과 그들을 먹일 곡식 재배를 위해 숲을 없애는 과정에서 생물 다양성이 훼손된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인과관계임에도 나 스스로는 연결지어 생각해보지 못했던 지점이다.
동물 및 자연에 대한 인간의 파괴력과, 힘이 약한 타인(혹은 국가)에 대한 지배는 비슷한 결을 가진 것 같다. 우리가 이제 겨우 소수 민족과 성소수자들과 디아스포라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한 것처럼, 앞으로는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노력도 더욱 필요해지지 않을까? 최재천 교수님은 강연 막판에 뉴질랜드에 있는 한 강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뉴질랜드 북섬에 거주하는 마오리족은 그들의 조상과 다름없는 왕거누이 강에게 법적 지위를 부여해달라는 소송을 140년 동안 지속해왔다고 한다. 그리고 2017년 마침내 이 강은 법인의 지위에 상응하는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교수님 또한 남방큰돌고래 생태법인 추진위원회에서 이와 같은 일을 추진하려고 하신다고 한다.
예술이 가진 치유와 돌봄의 힘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친다. 책과 마찬가지로, 예술은 타인의 삶이 어떤 형태를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서로 다름을 깨닫게 해준다. 아직까지 환경과 생물 다양성에 대해 도드라지게 목소리를 높이는 예술가의 수는 그리 많지는 않다. 하지만 기후 변화를 꾸준히 언급하며 작업에 반영하는 올라퍼 엘리아슨이나, 자연과 곤충의 힘을 빌려 압도적인 설치물을 만들어내는 네리 옥스만 같은 작가들의 작품 세계는 수많은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아주 잠시뿐이라 할지라도 기존의 생각에 균열을 일으킨다. 그 결과 개인의 의식에 아주 작은 파동이 일고 이것이 다음 의사결정을 내릴 때 조금이라도 개입한다면 그것이 바로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