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와 김향안의 에세이를 읽으며
집 앞 도서관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할 기회가 생겼다. 짧은 교육 프로그램을 짜면서 가장 염두에 둔 것은 중요한 우리나라 작가를 꼭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중 내 마음 속 1등은 의심이 여지 없이 김환기. 도서관에 들러 김환기 선생님과 관련된 모든 책을 다 빌려왔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미술관 일기, 환기 미술관 하이라이트, 집에 가지고 있는 Whanki in New York(김환기의 뉴욕일기)까지. 환기 미술관에서 출판한 도록을 제외한 나머지 세 권은 모두 작가 본인과 아내인 김향안 여사님이 직접 쓰신 일기다. 여러 권의 책으로 엮을 수 있을 만큼 오랜 시간 많은 글을 써오셨다.
예술가가 풍부한 기록을 남기면 후대에 작품 조사 및 해석을 할 때 너무나 귀중한 자산이 된다. 이 자료에서 작품 자체보다도 작가가 어떠한 인간이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는 점이 나에게는 큰 매력이다. 어느 시기부터 작품 형태에 변화가 감지되었는지, 그 때 작가가 어떤 마음으로 작업에 임했는지, 특정 사건이 작가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등이 작가의 글을 통해 솔직하게 공유된다. 환기 미술관 하이라이트에는 이런 구절들이 등장한다.
"점화가 성공할 것 같다. 미술은 하나의 질서다." (1965년 1월 2일)
"나는 점, 점들이 모여 형태를 상징하는 그런 것들을 시도하다. 이런 걸 계속해 보자." (1968년 1월 23일)
60년대 후반은 그가 단순화된 구상 형태에서 점차 추상으로 넘어가며 다양한 표현 방식을 시도했던 때였다. 형체를 추상화시키고 이내 수많은 점으로 찍기 시작한 이 역사적인 시기의 결심이 이렇게나 생생하게 그의 일기에 남아있다. 의구심이 없이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는 이 구절들은 나에게 늘 신선한 설렘을 불러일으킨다. 그렇게 탄생한 전면점화가 한국 근현대 미술의 걸작이 된다는 결말을 난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온 힘을 다해 그 시절의 김환기를 응원하게 되기 때문이다.
완전한 추상화를 추구하게 된 70년도에는 이런 구절도 남겼다. "미술은 철학도 미학도 아니다. 하늘, 바다, 산, 바위처럼 있는 거다. 꽃의 개념이 생기기 전, 꽃이란 이름이 있기 전을 생각해보다. 막연한 추상일 뿐이다." (1973년 10월 8일)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생각이 많고 장난기 넘치는 김환기 선생님의 성격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래서 6.25 전쟁을 겪으면서도 고통과 절망보다는 사람들간에 형성되는 동지애, 내일을 향한 희망에 초점을 맞추어 작업을 하셨다고 한다. 작가의 기록을 통해 그의 성격과 성향을 파악하면 작품이 단순한 물체가 아니라 작가의 숨이 담겨진 하나의 영혼처럼 다가온다. 작품이 사람처럼 느껴진달까. 나와 잘 맞는 성격일 것 같으면 친구를 하나 새로 사귄 기분마저 들게 한다. 그가 남긴 글과 그림에는 '향안에게'라는 구절과 함께 자신의 아내에게 바치는 것들이 많았는데, 그가 살아생전 그녀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 절절하게 와닿는 대목이다.
김향안 여사님은 평생 김환기 선생님의 곁을 지키며 그의 뮤즈로, 조력자와 후원자로 살았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환기 미술관을 세워 그의 작품이 영원히 살 수 있는 집을 지었다. 미술관을 세우자는 부군과의 약속을 기어코 지키셨음에도 살아계실 때 해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뭐 하나 허투루 결정하지 않기 위해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는 여사님의 신중함이 그녀의 미술관 일기 전반에 걸쳐 그려져있다. 에세이에 실린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드러나는 그들의 사랑은 환기 블루 컬러가 왜 동글동글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지 설명해주는 중요한 실마리가 아닐까 한다. 글이 그림을 설명하고, 또 그림이 글을 증명해주는 그런 고리가 형성된다.
에드워드 호퍼와 조세핀 호퍼도 비슷한 결이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에드워드 호퍼전을 통해 그의 아내 조세핀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그녀는 호퍼가 작품 커미션을 받으면 의뢰인의 정보, 작업 시기, 판매 가격, 작품에 대한 세세한 디테일까지 모두 글로 기록해두었다. 심지어 둘이 관람한 극장 티켓들과 스냅 사진들도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는걸 보면서 그녀의 소녀같은 면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작은 것들에서 즐거움을 찾고 활발한 그녀의 성격이 에드워드의 작가 생활에 분명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그녀의 기록들 덕에 우리가 이토록 풍부한 전시를 볼 수 있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에드워드는 많은 글을 남기지는 않았으나, 함께 여행을 다니며 숱하게 그려낸 조의 모습들이 아내에 대한 사랑의 말을 대신한다.
예전엔 작품을 볼 때 작품 자체에만 집중했다. 지금은 이 그림을 이렇게 그릴수 밖에 없었던 작가의 성격과 주변 인물들, 그리고 시대적 배경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이 간다. 따라서 작가가 일생에 걸쳐 남긴 에세이나 메모 등의 기록들은 나에게 대단히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그들도 나처럼 즐겨먹는 음식이 확실히 있고, 아름다움에 대한 취향이 있으며, 누군가를 사랑하고, 고민하며 살았다는 인간미 넘치는 모습을 글을 통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평생 서로의 곁을 지키면서 예술혼을 불태우고 이를 열정적으로 기록해둔 김환기 선생님 내외에 대해서는 왠지 오래된 친구를 보면서 드는 묘한 익숙함과 애정이 피어오른다. 누군가 '알면 사랑한다'고 했던가. 정말이다. 한 예술가를 잘 알게 되면 더욱 열렬히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