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목요일, 점심시간이 끝나고 약간의 노곤함이 밀려올 무렵 내 뒤편에 자리한 다른 팀 직원 한 명이 옆에 오더니 겉봉이 노란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그것이 무엇일지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능히 짐작할 수 있었으나, 다소 어색한 모습으로 서 있는 그에게 모르는 척 이게 뭐냐며 호기심 어린 물음을 던졌다. 그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축하의 말을 건네긴 했는데, 연이어 머릿속에 떠오른 건 결혼식장엔 가지 않을 것 같은 확신에 찬 예감. 같은 사무실에 있긴 하지만 소속 팀이 달라 업무적으로 겹치는 일이 없고, 오며 가며 마주칠 때 나눈 인사를 제하면, 지금껏 별로 말을 섞은 적 없어 데면데면한 사이인지라, 굳이 식장에까지 찾아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아있는 현실적인 고민 하나. 축의금은 얼마를 보내야 하나. 친숙하지 않은 사이의 청첩장이란, 주는 사람은 물론 받는 사람에게도 결코 산뜻할 리 없는 이물감 같은 걸 느끼게 만든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월요일 아침, 자신이 아끼는 동기와 동생 두 사람이 결혼을 했다는 누군가의 글을 읽었다. 직장 때문에 떠나온 본가 있는 도시를 거의 한 달 만에 찾아가, 비 오는 주말 그들의 결혼식에 참석하면서, 본인이 그토록 원했던 축사를 낭독하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써놓고 있었다. 신랑도 알고 신부도 아는 몇 안 되는 이들 중 한 사람으로서 기꺼이 누릴 수 있는 자격. 씨실과 날실을 교차하며 정성스레 예쁜 자수를 놓듯이 마이크를 통해 흘려보냈을 가없는 축하의 말. 어떤 내용의 축사였을지 궁금하기도 했으나, 긴장하지 않고 자신이 바랐던 만큼의 축하의 마음을 그들에게 전하게 되어 다행이었다는 말에, 궁금함을 해소하지 못한 내 몫의 아쉬움은 그냥 털어내도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다행이라는 표현에 꽂힌 탓인지 과거 언제쯤 내가 누군가의 결혼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불렀던 이적의 <다행이다>가 떠오르기도 했다. "그대를 만나고, 그대와 나눠 먹을 밥을 지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지난 수요일 오후엔, 추진 중인 업무 관련으로 이런저런 설명을 드려야 할 게 있어서 어느 분 사무실을 찾았다. 나이가 지긋했던 그는 뭐라도 하나 찾아내 지적할 요량으로, 지금 한 말이 정말 맞느냐며 관련 조례까지 인쇄해서 가져와 보라는 엄중함을 내비쳤지만, 정말로 스무~스하게 상황이 해결된 후로는 180도 분위기를 바꾼 채, 어서 빨리 그 자리를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을 붙들고는 뜬금없이 결혼에 관한 사담까지 늘어놓기도 했다. 나이 들어서 혼자 있으면, 여자는 살 수 있는데 남자는 살기 힘들다. 그에 대한 몇 가지 이유를 들면서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되도록이면 결혼을 하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100세 시대라는데, 자네 정도면 정말 아직 창창한 나이라면서.
굳이 각각의 요일을 밝혀 적은 건, 10일도 채 되지 않은 짧은 기간 동안 결혼에 관련하여 세 번의 에피소드가 있었던 것이, 아무래도 게으른 글쓰기를 일삼는 내게 은근한 자극으로 다가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정리하고 말 것도 없는 내 인생의 결혼. 어쩌다 보니 결혼과는 연을 맺지 못하였으나 그래도 다른 사람들의 결혼식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된 적은 있으니, 추억으로 돌아볼 만한 에피소드로서 이렇게 잠시 기록으로 남기는 시간을 가져보게 된다. 사랑해서 하는 결혼이 있고, 사랑하지 않아도 하는 결혼이 있으며, 사랑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데 등 떠밀려 하는 결혼도 있고, 죽도록 싫은데도 억지로 하는 결혼도 있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연관되었던 그들 모두의 결혼은 오로지 사랑해서 맺어진 것들이었으니, 오랜 후 그때를 돌아보는 지금의 나도 그저 흐뭇하기만 하다.
대학교 졸업을 전후로, 삼촌뻘 정도 되는 같은 과 L 선배님이 운영하시는 출판사에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한 적이 있었다. 나보다 세 학번 위의 C 선배는, 철학이나 문학 등 프랑스어 서적들을 번역해 출판하는 그곳에서 한동안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근무를 했었다. 컴퓨터를 사용하는 일을 도맡아 했던 그는 어느 날부턴가 채팅의 세계에 빠져들더니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고, 날이 갈수록 분당 타수를 높이는 저력을 보이며 키보드워리어가 아닌 키보드러버의 꿈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이쪽 세계를 졸업했던 나는 때때로 선배에게 효과 만점인 추임새를 넣는 법이라든지, 상대로 하여금 더욱 대화에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드는 고난도 비법들을 전수해주곤 했다. 그 당시 실질적인 사업 운영보다는 과 사람들의 친목 도모 차원에서 출판사를 차리셨던 선배님은, 가끔씩 대화창을 들여다보시며 "킬링!"이라는 최고의 찬사를 날리기도 하셨다. "캬아~ 죽이는구먼!" 결국 선배는 그렇게 해서 만난 한 사람과 결혼을 했고, 나는 그 둘을 이어준 사랑의 큐피드로서 진한 갈색 톤의 겨울 양복 한 벌을 선물 받을 수 있었다.
재수 없는 소리로 들릴지는 모르겠으나, 대학교를 다니면서 심심치 않게 듣곤 했던 말이 있었다. 나중에 자기가 결혼할 때 축가를 불러달라고. 기, 승, 전 건너뛰고 결론만 말하자면 서너 번 정도 축가를 불렀던 기억이 나는데, 여기 단톡방에 있는 사람들 중 두 사람의 결혼식 때도 축가를 불렀다. 나 포함 고등학교·대학교 동문 선배들 5명이 참여하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나만 아직 미혼이다. 과거 그들의 결혼을 축하해 줬던 나만 지금 혼자다. 뭔가 아이러니한 삶의 단면 하나를 목도하는 느낌. 인사 2번씩 하더라는 글을 쓴 선배의 결혼식에선 이적의 <다행이다>를, 이번엔 내가 축가 불러주겠다는 선배의 결혼식 땐 쿨(COOL)의 <사랑합니다>를 불렀다. 한때 시동인을 만들어 활동한 적이 있는데, 그때 만났던 한 분의 결혼식 때도 축가를 불렀다. 또 한 번의 <다행이다>. 그 당시 이 노래는 결혼식 축가에 관한 한 전국적 네임밸류를 자랑하는 히트송이었다. 그나저나 지금 이렇게 보니, 2024년 갑진년의 출발 즈음에 건강과 결혼을 빌어준 한 선배의 덕담은 유쾌했으나, 그에 대한 내 대답엔 뭔가 결론이 예정된 쓸쓸함이 깃들어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20대 중후반 무렵의 어느 밤, 집 근처 한적한 거리를 배회하다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우리 가족의 모든 불행이 오롯이 다 내게로만 쏟아졌으면. 성인 남자 세 사람이 방 한 칸의 집에서 산다는 건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피치 못할 사정. 이 세 개의 어절 속에 담긴 말 못 할 사연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여전히 한껏 쓰라리다. 누구는 건강이 좋지 않고, 누구는 사회생활이 잘 풀리지 않고 등등 세 사람 각각에 골고루 퍼져있는 고통들이 얽히고설킨 채 풀리지 않는 실타래가 되어 자꾸만 우리 가족 모두를 바닥이 아득한 구렁텅이로 빠트리는 듯했다. 폐허 속에 버려져 있는 것만 같았다. 이럴 거면 차라리 곁에 있는 두 사람이라도 편하게 내가 모든 걸 짊어진다면 어떨까. 그렇게 생각했던 그때의 나는 몸도 마음도 병들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도 많이 아팠다. 그때의 그 바람이 실제로 이뤄졌다면. 상상만으로도 공포가 밀려오기 시작하던 어느 시절의 나는 여러모로 제법 건강해진 상태였을 것이다.
흐르는 시간이 뭔가를 해결해 주는 기적은 그 시절의 우리 가족에겐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각자의 고통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자기만의 몫으로 끌어안은 채, 철저히 시간을 외면하며 지내야 하는 게 삶의 전부였고 최선이었다. 평범한 삶을 누린다는 게 그토록 어려운 거였구나. 그러다 언젠가, 내가 결혼이나 할 수 있을까 한숨을 내뱉곤 했던 형이 결혼을 했다. 인생의 동반자를 먼저 떠나보냈던 아버지는 고단한 몸으로 몇 년의 세월을 더 사시다 어머니를 만나러 가셨다. 삶은 사는 게 아니라 견디는 것이라 생각했던 한 시절이 지나고 보니, 어느덧 나는 혼자가 되어 있었다.
그 시절에 잃어버렸거나 사라진 것들이 몇몇 있었는데, 결혼도 그중에 하나였다. 사람을 잃어버린 게 아니고 관심이 사라져 버렸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즐겁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행복하지. 다만, 그 이후의 단계로 넘어가지 않는 것. 생각해보지 않는 것. 끝끝내 결혼은 접어두는 것. 그래서 나의 연애는 갈구하기는 하나 그 어떤 결실을 맺지 못하는 태생적 한계 속에서 특별할 것 없는 모습으로 지금껏 이어져 왔을 것이다. 사라져 버린 관심의 크기만큼 상대적으로 두려움이 커져서 생각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던, 결혼. 아마도 가장 쉽고 간결하며 명쾌한 진실은,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할 자신이 없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조승우와 손예진이 주연했던 영화 <클래식, 2003>의 OST <너에게 난 나에게 넌>. 조승우의 아들 역할로 나왔던 조인성이 손예진과 함께 비 오는 거리를 뛰어가는 장면에서 흘러나왔던 노래다. 점퍼를 벗어 머리 위에 함께 쓰고는 시원하게 내리는 빗속의 캠퍼스를 달리던 장면이 너무 예뻤고, 때마침 흐르던 OST 또한 수채화 같던 그 풍경 속에 온전히 녹아들어 대중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었었다. 그런데 참으로 희한하게도 언제부턴가 이 노래는 마치 내 인생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하는 것이었다. 해 질 녘 노을처럼 한 편의 아름다운 추억, 소중했던 우리 푸르던 날이야 기억할 게 없어 처연하기만 한데, 그럼에도 후회 없이 그림으로 남아달라니, 이 무슨 역설적인 시추에이션인가 말이다. 내 외롭던 지난 시간 환하게 비춰주던 햇살인 적 없었고, 나 또한 보석처럼 빛나는 영원의 약속 한 적 없는데, 왜 나는 말도 안 되는 이 상황 속으로 나의 결혼을 끌어들이는가 말이다. 푸르렀던 날 없어도 한 편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수 있는 내 인생의 결혼이라니. 그러고 보면 나는 여전히 다듬고 걸어가야 할 길이 많이 남은 철이 없는 자일지도.
토요일 한낮, 맑디맑은 창밖의 풍경이 한가롭다. 청소기를 틀고, 걸레질을 하고, 밀린 빨래를 넣고 세탁기를 돌리며 컴퓨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른다. 과거의 내가 불렀던 노래를 지금의 내가 따라 부른다. 역설적인 삶의 단편을 또 한번 곱씹으면서 결혼은 접고 노래를 부른다. 나를 위한 어느 선배의 축가를 들을 일은 없겠지만, 말이라도 고맙다는 카톡에서 쓸쓸을 걷어낼 수 있도록 일부러 더 크게 소리 내어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