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른다. 샹송을 부른다. 아니, 우울한 샹송을 읊는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누군가가 썼던 시를 읽는다. 아득한 그 언젠가 처음으로 이 시를 접했을 때, 훗날 내가 이 시를 들려줄 수 있는 너를 만나게 된다면 가슴 뭉클할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었을까. 네가 누구일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알 수 없는 너에게 자꾸만 어두워졌던 나를 편지에 실어 보내고 싶을 날이 있을 거라고. 끝내 덜어내지 못한 내 욕심을 종이에 꾹꾹 눌러 새긴 상처로 건네고 싶을 날이 있을 거라고. 어쩌면 그런 예감이, 잃어버린 사랑을 마주했던 그 시절의 내가 이 세상을 견딜 수 있도록 만든 여러 사소한 이유들 중 하나였을지 모른다고.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풀잎 되어 젖어 있는
비애를
지금은 혼미하여 내가 찾는다면
사랑은 또 처음의 의상으로
돌아올까
우체국에 오는 사람들은
가슴에 꽃을 달고 오는데
그 꽃들은 바람에
얼굴이 터져 웃고 있는데
어쩌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얼굴을 다치면서라도 소리 내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사람들은
그리움을 가득 담은 편지 위에
애정의 핀을 꽂고 돌아들 간다
그때 그들 머리 위에서는
꽃불처럼 밝은 빛이 잠시
어리는데
그것은 저려 오는 내 발등 위에
행복에 찬 글씨를 써서 보이는데
나는 자꾸만 어두워져서
읽지 못하고,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기진한 발걸음이 다시
도어를 노크
하면,
그때 나는 어떤 미소를 띠어
돌아온 사랑을 맞이할까
[우울한 샹송 : 이수익]
우울이라는 키워드 때문인지 언뜻 일전에 읽었던 책 <아무튼, 영양제>가 생각이 났다. 주된 내용이야 영양제에 관련한 것이었지만,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부분들 중 하나는 책 속에 소개된 "슬픔의 5단계" 이론이었다고 언젠가 브런치에 쓴 적이 있다. 슬픔이나 죽음을 맞닥뜨렸을 때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인 행동 양식은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시간적 과정을 거친다는 것. 그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내 젊음의 대부분을 욱죄고 있었던 그 어떤 슬픔 하나에 대해 언젠가부터 수용의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래도 참 많이 고달팠던 시간들이었음을 감안하면, 그러려니 하며 마냥 그 슬픔을 품어 안을 수만은 없는 일. 하여 때로는 오래된 분노를 소환하고 체념에 굴한 채 잠시 잠깐 우울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제 그건 내가 견디고 가라앉힐 수 있는 우울이라 걱정이 없다.
어설픈 완벽주의자의 삶은 괴롭다. 말 그대로 달성해 낼 수 없는 완벽주의로 스스로를 고통 속에 빠트릴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매 순간 겪는다는 것.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는 이렇게 태어나지는 말아야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이수익 시인의 <우울한 샹송>을 읽을 때면, 내 어설픈 완벽주의 때문에 잃어버린,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시작부터 결국엔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녔던 내 지난날의 사랑이 떠올라 마음이 짠해진다. 나는 모든 걸 갖추고 있을 때 비로소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빌어먹을 그 하나의 슬픔 때문에, 그 슬픔을 낳게 한 저주스러운 어느 사건 때문에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하지 못하고 끝내 스스로 세워 놓은 벽에 막혀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시절. 그래서 이제 그 슬픔을 수용할 수 있다는 건 무릇 선물 같은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어떻게 보면 이런 내 모습을 한 자 한 자 글귀로 풀어낸 편지를 보낼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참 행복한 일이지 않을까.
며칠 전, 밑반찬 몇 가지를 사기 위해 차를 몰고 나섰다. 집 근처에도 반찬을 파는 곳이 있긴 한데, 종류는 물론이거니와 가격에 비해 각각의 용기에 담긴 반찬의 양도 그다지 마음에 차지 않아, 거리는 멀지만 일부러 시간을 내어 예전에 근무했던 곳 근처에 있는 가게로 향하곤 한다. 주말에 내렸던 비 때문이었는지 오래도록 기승을 부렸던 여름 무더위가 순식간에 사라져 아침 공기 자체가 달랐던 그날, 때마침 DJ는 뒤늦게 당도한 계절을 반갑게 맞이하며 여러 가을 노래들을 틀어주고 있었다. 신호등에 걸려 정차를 하고 있던 중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던 귀에 익은 노래. 가을, 우체국, 그대, 그리고 기다림.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우연히 빠져든 어떤 생각에 관해 얘기하고 있지만, 정작 노래를 듣다 보면 마치 자신이 바라보는 삶에 대한 자세를 그대에게, 아니, 오히려 자신에게 묻고 다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지, 하늘 아래 모든 것들이 각자의 고난을 이겨낸 꽃과 나무처럼 저 홀로 설 수 있을지, 이런 우연한 생각에 관해 펜을 들어 한 통의 편지를 써 내려가는 것만 같은 누군가. 날이 저물도록 기다리고 기다려도 끝내 오지 않을 그대를 예감하는 우체국 앞에서.
https://youtu.be/I0U6qYAfvnY?si=tfrlSdCAdjy_4UA-
이수익 시인의 시가 잃어버린 사랑의 감정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면, 윤도현의 노래는 바로 그 감정이 향하는 대상에 대해 노래하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든다. 사랑,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 그러나 서로 닮아있는 건 감정이든 사람이든 마음으로 가슴으로 품어 안을 수는 없다는 현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슬픔에 거꾸러진 자가 바라보는 시와 노래가 착잡하게 느껴지는 건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 우체국 계단 한쪽 구석에 앉은 채, 그리움을 가득 담은 편지를 들고 그곳을 다녀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화자. 그들처럼 나도 언젠가 다시 사랑을 맞이할 수 있는 걸까. 가을 우체국 앞, 은행잎은 바람에 날려가고 지나는 사람들도 저 멀리 가고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홀로 선 꽃과 나무처럼 나 또한 홀로 설 수 있을지 자문하는 화자. 이러구러 날은 저물었는데 정녕 그대는 오기는 하는 걸까.
진실로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말보다는 편지로, 그렇게 우체국을 찾아가는 설레는 마음에 가을이라는 우연까지 겹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노래와는 달리 날 저물도록 하는 생각 속에 오로지 너만 있노라 고백해도 좋고, 괜히 딴청을 피우며 쓸데없는 날씨 얘기부터 시작해 시시콜콜하고 자질구레한 일상을 지루하게 채워 넣어도 좋고,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노래했던 어느 시인의 시에 고무되어 지금껏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내 오래된 슬픔 하나를 뽐내듯이 찬찬히 풀어내 전해봐도 좋고. 그래서 내가 언제 또다시 편지라는 걸 써볼 수 있을까 의심하며 짐짓 울적해했던 순간을 까마득히 잊어낼 수 있다면 좋겠다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물론 편지를 쓰는 일에 계절이 무슨 이유가 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우울한 샹송>을 읽다 보면 <가을 우체국 앞에서>를 듣다 보면 시와 노래의 저변에 깔린 잔잔한 우울에 경도되어, 이 가을 나도 모르게 괜스레 펜을 들고만 싶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