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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파꽈리 May 20. 2024

이상한 팥빙수 사랑

특별한 일이 없다면 평일에 아침과 점심 두 번 정도 산책을 한다. 남들에 비해 비교적 이른 시각에 출근을 하는 터라 업무를 시작하기 전 40분 정도 근무처 주변으로 산책을 하고, 점심을 먹고 난 후에는 아침에 들렀던 곳과는 또 다른 데를 느린 걸음으로 여유 있게 둘러보고 오는 식이다. 지난주 어느 아침엔 산책을 하고 돌아오다가, 근무처에서 가까운 어느 프랜차이즈 빵집 통유리창에 붙어있던 팥빙수 개시 전단을 보았다. 팥빙수라. 벌써 그 계절이.


오래전 일이다. 평소 성격이 수더분한 L 선배는 웬만한 일에는 좀처럼 발끈하지 않는데, 그날만큼은 평소와 다르게 어떤 노래 한 곡을 듣고서 예상치 못하게 광분하는 바람에 내심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시방 이거이 노래여? 가수 완전 날로 묵어불고마에~"


줄곧 혈압을 높이던 선배. 라디오에서는 윤종신의 <팥빙수>가 흐르고 있었다. 사정을 들어보니 그가 이 노래를 껄끄러워했던 이유는 다소 유치한 가사와 더불어 동요 비슷한 멜로디 때문이었는데, 공일오비(015B) 세대로서 그에게는 이처럼 확 변해버린 윤종신의 노래 스타일이 지극히 못마땅했던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당시 방송에서의 그의 모습도 딱 팥빙수 같은 분위기였는데, 아마도 이 노래를 부를 즈음부터 자신의 이미지 또한 그와 비슷한 쪽으로 만들어 가리라 작정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선배와 달리 나는 이 노래가 발랄하고 귀엽다는 측면에서 오히려 점수를 더 주고 싶었는데, 이런 생각에는 아마도 그 무렵 인상적인 동영상 한 편을 본 탓도 있을 것이다. 유치원생이라는 아이디의 어떤 여자 분이 녹음실에서 팥빙수를 부르는데 목소리와 더불어 표정이나 몸짓이 얼마나 깜찍하던지. 혹시 몰라 유튜브에서 "팥빙수 & 유치원생"으로 검색해봤더니 아직 그 영상이 살아있다. 


그런데 이처럼 노래가 흥겹고 재미있는 건 분명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사에 관련하여 처음 이 노래를 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아직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하나 있다. 가사 초반에 자신이 좋아하는 팥빙수를 어떻게 조리하는가 하는 내용이 깔릴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그런 팥빙수를 갑자기 사랑한다고 하는 지점부터 뭔가 뉘앙스가 이상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평소 우리가 먹는 거에 대해서 좋아한다고 하기는 하지만 이것을 사랑한다고 표현하기도 하는지. 게다가 좋아한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사실 감정의 깊이로 연관되어 있는 말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기본적인 메커니즘 자체가 포토샵의 그러데이션 효과처럼 좋아하는 감정이 더욱 깊어지고 심화되어서 알게 모르게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바뀌는 게 아니(물론 예외가 전혀 없진 않을 테지만)라는 얘기다. 너무너무 좋아한다, 매우 좋아한다는 말이 사랑한다는 말과 동의어가 될 수 없고 결국 좋아한다의 범주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처럼 좋아한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물들 수 없는 나름대로 각각의 독자적인 포지션을 지니고 있는데 우리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그 쓰임새 또한 이와 마찬가지다. 


하지만, 좋다. 팥빙수를 사랑한다고 하는 표현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치자. 밥을 사랑한다, 김치를 사랑한다는 말도 종종 하니까. 그런데 '빙수야~ 팥빙수야~ 싸랑해~ 싸랑해~'하는 가사는 대체 뭔가. 팥빙수를 만들어가는 과정의 가사는 그 대상을 3인칭으로 두고 조리하는 방식을 취하므로 그 이해도나 느껴지는 부분에 있어 전혀 무리가 없는데, 후렴에서 갑자기 2인칭의 어조로 온갖 친근한 뉘앙스를 담아서 팥빙수를 호명하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얘기다. 


보통 우리가 먹는 거에 대해서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것은 조리에서 시식까지 그것을 온전히 2인칭이 아닌 3인칭의 대상으로 보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것 아닐까. 예를 들어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 "나는 이게 좋아, 나는 저걸 사랑해."하는 방식으로. 게다가 노래를 들어보면 '사랑해'도 아니고 무려 '싸랑해'인데, 2인칭의 팥빙수에게 그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마치 끝까지 지켜줄 것처럼 '녹지 마~ 싸랑해~' 연신 자신의 기호와 애정을 표출하다가 결국엔 사랑으로 잡숴버리는 것이 어떻게 보면 코미디나 호러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말이지. 엄밀히 말하자면 호러에 가깝다고 보지만. 


누군가 팥빙수를 만들면서 다음과 같이 중얼거린다고 상상해 보자. '팥빙수야, 난 너를 싸랑해. 녹지 마. 난 네가 녹는 거 싫어. 왜냐하면 맛이 없어지거든. 계속 말하지만 난 너를 싸랑한단다. 팥빙수야, 이제는 때가 되었어. 녹지 않아 줘서 고마워. 싸랑하기 때문에 너를 먹는 거야. 이젠 안녕.' 


프랜차이즈 빵집에 등장한 전단지처럼 진정한 팥빙수의 계절이 도래할 날이 머지않았다. 팥은 좋아하지만 빙수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팥빙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끝내 먹어 치우고 마는 가사 속 황당무계한 일을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농담처럼 습하고 더운 어느 여름날, 이처럼 뜬금없는 비장함을 품고 있는 내게 어디선가 무더위에 지친 팥빙수 사장님의 격한 음성이 들려올 것도 같다.


"그래? 그럼 나도 너한텐 죽어도 안 팔아!"


https://youtu.be/SWcZJ7_wn3U?si=8zAcsva8g3ys-Z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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