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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파꽈리 Oct 08. 2023

기억의 진화 - 다시 태어나도 지금 배우자와 결혼을?

<이터널 선샤인, 2005>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고 나 또한 여러 번 봤을 만큼 참 재미있었는데, 사실 처음으로 이 영화를 보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었다. 순전히 짐 캐리 때문이었다. <에이스 벤츄라, 1994> 풍 영화에나 어울릴 법한 사람이 진지한 연기를 펼친다고 하는데 나로서는 180도 확 바뀐 그의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었거니와 더불어 그가 과연 제대로 된 연기를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상당한 의문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게 웬걸!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괜스레 그에게 미안해졌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활기가 넘치는 한 여자와 이에 비해 다소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한 남자가 서로 사랑하다 이별한 후 어떻게 다시 만나게 되는지 보여주는 영화, <이터널 선샤인>.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라는 게 까놓고 보면 다 거기서 거긴데 이 영화는 조금 특별하다. 그것은 바로 인물이 아닌 기억이라는 것을 중심축으로 놓고 사랑을 조리해 나가기 때문인데, 영화 속에서 기억은 추억을 재현하는 일반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기 스스로 생존방식을 터득해 나름의 진화를 거듭한다. 딜리트 센서가 도무지 감지하지 못하는 곳으로 숨어버릴 만큼 창조적인 기억이라니! 일상에서 간혹 느끼는 근원을 알 수 없는 그리움이란 게 혹시 이 같은 특별한 기억의 부산물은 아닐까. 누가 누구를 알아본다는 것, 당신이 내 사람이라는 걸 알아본다는 것은 실로 기쁘고 설레는 일임이 틀림없는데, 바로 이 같은 이야기가 이터널 선샤인에 담겨있다. 겨울 풍광을 배경으로 함박눈이 내리듯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영화에 관련해 두어 가지 얘기해보고 싶은 소재들이 있다. 첫 번째가 바로 그들의 연애 기간. TV를 비롯한 각종 미디어에서 가끔씩 결혼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런 설문을 하곤 한다.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그때도 지금 배우자와 결혼을 하겠는가. 물론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혼부부의 입에서 어떤 대답이 나올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가 있지만, 십 년 이십 년 혹은 그 이상을 함께 살아온 부부에게서 어떤 대답이 나올지 예측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당사자들의 생각도 생각이지만 해당 프로그램의 성격에 따라 그 답이 달라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재치와 익살을 동반한 즐거움을 주기 위한 쪽이라면 No를, 서로 간 인생의 반려자로서 온갖 역경을 이겨낸 감동의 측면이라면 Yes를 선택하는 게 아무래도 자연스러울 테니까. 


출처: https://hrcopinion.co.kr/archives/23199#


위 자료는 방송매체가 결부된 게 아닌 개별적 설문으로 조사된 결과일 테니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보여주기 식 대답은 없는, 말 그대로 기름기 쫙 뺀 통계가 아닐까 싶다. 일단 남자든 여자든 모두 지금 배우자 말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는 비율이 높고, 남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자가 현재 배우자에 대해 그다지 연연하고 있지 않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세대별 차이는 있을 테지만, 결혼을 하고 같이 생활하면서 평균적으로 여자들에 대한 남자들의 기대치보다 남자들에 대한 여자들의 기대치가 더 많이 무너진다고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다. 21세기로 접어들면서 과거에 비해 셀 수 없이 많은 여성들이 사회생활을 통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주체적 의사결정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또한 위와 같은 통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 설득력 있는 이유들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싶다.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함께 살았던 세월이 오래되었을수록 현재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는 의견 비율도 높아진다는 게 흥미롭다.


다시 영화 얘기로 돌아오면 주인공 조엘(짐 캐리)과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은 만남부터 헤어짐이 있기까지 동거 상태로 2년 정도 사귄 사이로 나온다. 2년이라. 남자 여자 함께 지내면서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은 죽을 때까지 지속된다고 하지만, 서로 간에 용인하기 힘든 굵직굵직한 개별적 특성 때문에 끝내 이별을 생각할 정도의 갈등상황에 직면하는 일은 왠지 2년이라는 기간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그것을 참고 사느냐 아니면 참지 못하고 끝내느냐 하는 건 또 차후의 일이고.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서로에게 반했던 기본적 바탕은 완전히 정반대의 성격/성향 탓이었다. 내가 갖지 못해서 내게 없어서 매력적으로 보이는 상대방의 모습이 서로를 끌어당긴다. 물론 현실 속에서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끼리 끌리는 경우도 있으나, 일단 영화 속 설정이 이러했던 건 아무래도 하나하나 각기 다른 개체로서 성격조차 판이하게 다른 인간들이 사랑이라는 걸 통해 어떻게 서로를 닮아가며 융화해 가는가를 극적으로 부각해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사랑에 빠지게 했던 상대방의 이러한 면모들이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헤어짐의 결정적인 단초가 된다는 것. 함께 지내는 세월이 쌓이면 식성이나 취미 등등 전반적인 생활패턴이 비슷해지고 심지어는 얼굴까지 닮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결국 한 인간으로서의 본질적인 부분은 여전히 독립적으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 부분을 용인할 수 있으면 같이 가는 거고 도저히 그러지 못하겠으면 헤어지는 거고. 결국 상대방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바꾸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고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에 관한 문제다.


한때 헤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만난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결국 함께 가는 걸 택한다. 이래야 영화가 된다. 다만 한 가지 궁금했던 건, 만약 그들이 함께 지냈던 시간이 2년이 아니라 십 년 이십 년 혹은 그 이상이었다면 그때도 그들은 같은 선택을 했을까 하는 것. 물론 함께 지낸 세월의 양에 따라 이별의 이유 또한 달라지는 변수가 있을 테지만, 아무튼 그렇게 모진 말을 내뱉어 가며 상대의 가슴에 비수를 꽂은 채 이별했던 사람들이 다시금 서로를 갈구하게 만드는 건 무슨 이유 때문일까. 여기엔 2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연애 기간도 한몫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한 번 헤어진 후 다시 만나면 또다시 같은 이유로 헤어지게 돼있다며 재결합을 만류하는 사람들이 많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얘기일 수도 있고 실제 겪어보진 않았지만 주위에서 보고 들어서 그렇게 충고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개인적인 느낌으론 이 의견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훨씬 많은 듯하다. 하지만 결국 선택은 당사자들의 몫. 


자신이 실제로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들은 묘한 매력으로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그에 대한 선택을 강요한다. 그렇다면 과연 산전수전 공중전 다 맛봤을 법한 중년/노년과 이제 갓 2년의 세월을 함께한 연인들은 이 상황에서 각각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최소한 다시 한번 가보자는 선택의 가능성에 있어서만큼은 전자보다 후자가 훨씬 크지 않을까. 상대적으로 그들에겐, 열정이든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이든 간에 다시금 서로를 절실히 원하게 만드는 에너지란 게 있지 않을까. 예고된 갈등을 기꺼이 감수하겠노라는 결심, 그 선택이 그저 또 다른 하나의 시행착오에 불과할지 아니면 이전보다는 조금 더 확장되고 발전된 관계를 만드는 밑거름이 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두 번째로 얘기해보고 싶은 소재는 역시 기억이다. 기억을 지운다는,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기억이 진화한다는 참신한 아이디어가 바로 이 영화의 백미다. 격정적인 헤어짐으로 피폐해진 마음을 다스리기 힘들어 아예 상대방에 대한 기억 전체를 지워버리기로 결심하는 두 주인공. 2년이라는 기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느꼈던 모든 희로애락이 하나하나 지워지면서 슬픔이나 분노보다는 기쁨이나 즐거움이 부각되고 마침내 정말로 잊히지 않길 바라는 기억과 맞닥뜨렸을 때, 그 기억은 스스로 진화하기 시작한다. 영화 속에서 기억의 처리 과정은 조엘의 경우만 나타나지만 이에 앞서 기억을 삭제했던 클레멘타인도 조엘과 똑같은 기억의 진화를 겪었을 거란 건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딜리트 센서가 감지할 수 없는 곳으로 진화해 가는 조엘의 기억. 


인간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는 자신만의 비밀들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수치스러움이나 부끄러움, 그리고 두려움과 같은 감정과 얽혀있는 기억들. 너무나 감추고 싶은 나머지 심지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작되거나 망각되기도 하는 기억들. 상대방과의 행복했던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조엘은 자신의 가장 내밀한 기억 속으로 클레멘타인을 데려간다. 야한 잡지를 보며 자위를 하다가 엄마에게 들켰던 기억 속으로, 또래 아이들의 강요로 원치 않게 다친 새를 망치로 내려쳤던 기억 속으로, 바쁜 일과로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던 유아 시절의 기억 속으로 클레멘타인을 안내한다. 그 기억 속이라면 딜리트 센서의 감지를 피해 클레멘타인과 함께 나눴던 기억을 지킬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희망을 갖는다. 이는 평소 클레멘타인이 자주 언급했던 바람대로 조엘이 처음으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 보이는 순간을 의미한다. 아무도 모르게 꽁꽁 감춰왔던 자신의 수치스럽고 부끄럽고 두려웠던 과거를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상대방에게 보여줌으로써 무너뜨리기 힘들 것 같았던 자신만의 벽을 허물고 비로소 클레멘타인과의 관계 확장을 이루는 대목이다. 무릇 몸을 섞고 마음을 나누며 살아가는 동반자라면 최소한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이. 영화 기법상에 있어서 개인적으로 정말 감탄했던 그런 연출이었다.


흔히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한다는 결혼. 그런데 그 후회라는 게 전혀 다른 성질의 후회. 결혼한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의 후회가 뭔지 알지 못하고,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은 결혼한 사람들의 후회가 뭔지 느낄 수 없다. 일부러 선택하는 후회일 수도 있고 상황이 여의치 않아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되는 후회일 수도 있는데, 적어도 이 영화를 보고 난 후라면 후회의 성격과는 상관없이 결혼을 선택하고픈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굳이 결혼이라는 사회제도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반복되는 고통을 예견함에도 불구하고 다가올 미래를 누군가와 함께 하고픈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있어 영화 속에 나오는 별자리 이야기는 마치 어둠 속에서 길을 안내하는 등대와 같다고 할까. 사랑이란 이미 알고 있고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상대방에게 보여주는 게 아니고 둘 다 모르는 것들을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해주는 듯한 에피소드였다. 철학자 니체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망각한 자는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 기억을 삭제하여 상대방을 잊고 싶었던 사람들이 결국 망각의 복을 걷어차고 실수를 거듭하는 굴레 속에 기꺼이 빠져드는 선택을 하는 것. 이제 내 인생의 밸런타인데이는 없을 거라 생각하며 사는 사람조차도 그게 바로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랑 때문이라는 것쯤은 알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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