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파꽈리 Oct 25. 2023

몸으로 익히는 사자성어


<로봇 찌빠>라는 만화가 있었다. 미국에서 만들어졌으나 설계상의 오류 때문에 하자품으로 판명되어 한국으로 오게 된 인공지능 로봇인데, 우여곡절 끝에 팔팔이네 집 식객으로 자리하면서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을 낳는다. 두뇌 쪽에 오류가 있어서 다소 바보스럽고 별난 일을 일삼는 로봇 찌빠. 어렸을 때 재미있게 봤던 것치고는 생각나는 내용이 거의 없어서 이상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지금껏 흘러간 세월이 얼마인지 헤아려 보니 한편으로는 또 이런 상황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런 빈약한 기억의 토대에서도 지금까지 선명하게 남아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으니 그건 바로 지식의 습득에 관한 내용이었다.


팔팔이하고 로봇 찌빠가 서재에서 얘기를 나누다가 어떻게 하면 책에 담겨있는 내용들을 머릿속에 쏙쏙 집어넣을까 하는 걸로 고민을 하고 있는 상황. 엉뚱한 로봇 찌빠가 처음엔 그냥 단순하게 "책들아, 내 머릿속으로 들어와!" 주문을 외는데, 말 그대로 책장에 꽂혀있던 책들이 한꺼번에 자기에게 달려드는 바람에 외상을 입고 만다. 팔팔이의 타박을 듣고 난 후 로봇 찌빠는 책이 아닌 책에 담긴 내용으로 주문을 수정하게 되지만 여러 방면의 다양한 내용들이 한꺼번에 주입되면서 머리에 과부하가 걸리고 이내 도무지 견딜 수 없는 두통으로 신음하다가 결국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래, 지식은 이렇게 마술을 부린다거나 하는 요령을 부려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이 직접 책에 담긴 내용들을 읽어가면서 하나하나 습득하는 거구나.' 어린 나이여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아무튼 당시 그 에피소드는 참 인상 깊었다.


이렇듯 지식이란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진지하게 습득하는 게 일반적이며, 아울러 그 대부분은 정신적 노동의 과정을 거치는 게 보통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실생활에서 몸으로 직접 부대끼며 터득하고 익히게 되는 경험적인 면을 간과할 수는 없는 일. 문득, 이와 관련하여 과거 언젠가 겪었던 몸서리치는 에피소드가 하나 떠오른다. 이름하여 몸으로 익히는 사자성어. 그렇다고 앵무새가 몸으로 울었다거나 하는 영화를 떠올리며 설왕설래의 성인용 버전을 생각하면 오산. 각설하고, 아무튼 이번에 소개할 사자성어는 토사곽란(吐瀉癨亂)이 되겠다. 일단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뭔가 거칠고 지저분하며 드~러운 기분이 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다.


어느 겨울이었다. 중국에서 의류사업을 하고 있던 한 선배가 설연휴에 한국으로 들어왔는데, 꽤 오랜만에 보는 터라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하루 날을 잡아서 만났다. 저녁식사로 삼겹살에 소주를 시켜놓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문제는 그날따라 분위기에 휩쓸린 탓인지 평소 내 주량을 살짝 오버하고 말았던 것. 시간은 흐르고 어느덧 자리를 정리할 때가 되었다. 후텁지근했던 실내에 비해 밖은 꽤나 쌀쌀했기에 몽롱해진 정신을 회복하는 데 다소 효과가 있었지만, 체질적으로 알코올 분해 효소의 분비가 원활하지 못한 나로서는 끝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 별 탈 없이 집에까지 잘 도착했으나 몸이 피곤했던 탓에 씻는 것도 잊고 잠시 몸을 뉘었는데, 방안의 온기 때문이었는지 나도 모르게 방심을 하고 말았다. 굳건한 정신력으로 버텨왔던 지난 시간들이 한순간에 어그러질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 마음과 달리 육체의 저 깊은 곳에서는 슬슬 워밍업을 하기 시작하는데, 혼란스러웠던 건 그때의 불길한 진원이 위장인지 대장인지 선뜻 가늠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혼미한 의식과는 별도로 선명하게 요동치기 시작하는 마이 바디! 급속도로 침침해지는 시야를 가까스로 확보하면서 나는 일단 화장실로 직행했다. 그리고 초스피드로 혁대 풀고 바지 내리고 앉아 쏴! 혼미한 정신 때문에 앉기 전에 발포를 했는지 아니면 앉고 나서 발포를 했는지 정확히 기억할 순 없지만, 아무튼 한바탕 퍼부어주고 나니 조금은 살 것 같았다. 그때 문득 스쳤던 기억 한 가지는, 대학 다닐 때 학과 조교 선배가 어느 날 끓는 배를 움켜쥐고 지하철 화장실을 가려다 계단에서 발을 살짝 헛디디는 바람에 그만 푸드득~ 하고 말았다던 훈훈한 에피소드. 중력의 법칙에 순응하여 순도 100%의 설사가 발목을 적시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결국 지하철 화장실 한쪽 구석에서 빤쓰를 씻어가며 뒤처리를 했다던 선배. 아무튼 짧은 순간 그렇게 과거를 떠올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갑자기 뭔가 석연치 않은 기운이 엄습했다. 변기에 앉아 있는 자세가 평소와 다르게 너무 불안한 게 아닌가. 엉덩이 각도만 살짝 비틀면 언제라도 변기 속으로 풍덩 할 것 같은 상황. 급한 나머지 나는 그만 변기 받침대를 내리지 않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본게임은 이제부터다. 어찌나 정이 많은지 한 방으로는 만족할 것 같지 않은 대장의 컨디션. 엉거주춤한 자세로 받침대를 내리고 2차 발포를 준비하던 중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황당한 상황에 봉착하고 말았다. 이제는 자기 차례라며 위장이 용틀임을 하기 시작했던 것. 대장의 명을 따라야 할지 위장의 분부를 받들어야 할지 나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진정한 선택의 딜레마는 역시 여러 가지 것들 중에 하나가 아니라 둘 중에 하나를 고르는 데서 비롯되는 게 아니던가. 0.5초 간격으로 움찔움찔하고 있는 괄약근 VS. 3일 굶은 개처럼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입. 무게의 추가 위장 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었지만 해결해야 할 문제가 또 하나 있었다. 나중에 2차로 발포를 하더라도 일단 먼저 뒤를 닦아야 하지 않겠나 하는 21세기 문명인의 갈등. 하지만 이것도 몸이 따라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는 일 아니겠는가.


그래서 결국... 못 닦았다.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그 짧은 순간을 쥐어짜 내지 못하고 눈물을 머금은 채 화급히 뒤돌아서 위장의 명을 받들고 말았던 것. 바지를 내린 채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자세로 변기를 부여잡고 하소연을 하게 되다니. 하지만 그렇듯 씻을 수 없는 치욕으로 버무려진 순간에도 일단 먼저 레버를 눌러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으로 뜨끈뜨끈한 설사를 내려 보내는 마지막 자존심만큼은 잊지 않았다. 그렇게 아래위로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났더니 이제는 정말로 살 것 같은 기분! '깨끗하게, 맑게, 자신 있게' 큰소리로 외치고 싶은 기분! 폭풍처럼 휘몰아친 격전의 와중에도 굳건히 뒷문을 닫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괄약근에게도 마침내 편안한 안식을 줄 수 있게 되었다.


자 그럼 이쯤에서 드~러운 기억을 추스르고 토사곽란의 의미를 살펴보자. 위로는 토하고 아래로는 설사하면서 배가 질리고 아픈 병. 이번 경우엔 일단 계속해서 배가 질리고 아픈 병증은 제외해야 하겠지만, 굳이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실제 사례를 통해 본 그 의미만큼은 머리에 확확 들어와 박히지 않을까 싶다. 토할 토(吐), 쏟을 사(瀉), 곽란 곽(癨), 어지러울 란(亂). 이건 뭐 한자까지도 마치 한글인 것처럼 친숙하기만 하다. 과거 언젠가 눈으로 보고 머리로만 익혔던 사자성어를 이렇게 몸으로 직접 체험해서 각인하게 되고 보니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기도 하고. 덧붙여 밥 로스 아저씨의 한 말씀!



매거진의 이전글 기억할 만한 지나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