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으로 필요한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이름 모르는 한 아마추어가 연주한 Masaaki Kishibe의 <花>를 만나게 되었다. 핑거스타일 기법의 기타 연주인데 왜 그렇게 가슴을 아련하게 하던지.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반복되는 그 선율 속에 이야기가 담기기 시작했다. 내가 듣지 못했던, 내가 말하지 못했던, 그렇게 내 마음을 억눌렀던 어느 날의 기억이 산들바람을 타는 듯한 여러 음표들의 출렁임으로 허공에 흩어져가기 시작했다. 세상 밖으로 터지지 못했던 가슴속 사연들이 하늘하늘 선명하게 휘날리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로 오래도록 귓전에 맴돌던 풍경. 이를테면 꽃(花)으로 화한 내 안의 언어인 것이다.
어떤 음악은 선율 그 자체로 감정선을 건드리는 경우가 있는 반면 또 어떤 음악은 특정한 사연을 만들어 사람의 마음을 두드리기도 한다. 물론 후자의 경우는 일단 개개인의 경험이 해당 음악에 반영되어 나타나는 결과로 보는 게 더 타당할 테지만, 어쨌거나 음악이 그저 소리의 집합체에 그치지 않고 어떤 이야기를 담게 된다는 것, 다시 말하면 누군가의 사연을 음표를 매개로 하는 색다른 언어로 빚어낼 수 있다는 사실은 참 신기한 일이다. 이 같은 경우엔 언어의 개념을 다소 확대 해석한 감이 없지 않지만, 언어의 궁극적인 기능이라 할 수 있는 의사소통의 관점에 본다면야 음악도 하나의 언어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언어가 사라지면 인간도 사라진다(When language dies, so will man)고 언어학자 David Thompson이 말했듯이 오늘따라 왠지 나는 또 하나의 언어인 음악이 사라져도 마찬가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예전에 언어에 관련한 어떤 책을 소개했던 신문기사 한 토막이 떠오른다. 사피어-워프 가설. 언어가 다르면 사람들의 인식과 생각에도 차이가 생긴다는, 즉 서로 다른 말을 쓰는 겨레는 그 인식에 있어서도 서로 상대적이라는 '언어 상대성 원리'에 입각한 주장을 담고 있는 책에 관련한 내용이었다. 언어는 태어날 때부터 인간의 유전자에 박혀있는 본능에 다름없어서 모든 인류의 언어는 똑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노암 촘스키를 위시한 현대의 보편문법론과는 상치되는 내용이라 다소 흥미가 있었다.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사고방식을 지니게 된다는 이 가설에 나름 고개가 끄덕여졌는데, 학자들 사이 오랜 검증의 과정을 거쳐온 결과 현재는 맞는 것도 틀린 것도 아닌 상태에 있다고 하니 역시 언어란 참 신비롭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규정하기 힘든 영역에 존재하는 대상. 그러나 바로 그것을 만들어낸 건 인간.
언젠가 나는 수많은 사람들로 들끓는 이 세상에서 나와 상대방 단 둘만이 아는 언어로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바람을 가진 적이 있었다. 소리를 내지 않고 마음으로 나누는 언어(內語, l'endophasie)도 좋지만, 이 지구상에서 오로지 두 사람만 아는 언어로 대화를 나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탓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앞선 기사에 언급되었던 '언어 상대성 원리'를 잠깐 인용해서 대입해 보면 어떨까. 하나의 언어를 공유하는 두 사람, 그렇게 인식과 생각이 동일한 두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그리고 그들의 관계를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음악과 언어와 내가 뒤섞이고 있는 지금, 보들레르의 시 한 편이 떠올라 옮겨놓는다. 기타 연주와 시, 그리고 내가 꿈꾸었던 언어. 아련함이 난무하는 이 순간이 참으로 고요하다.
거리는 내 주위에서 귀가 멍멍하게 아우성치고 있었다.
갖춘 상복, 장중한 고통에 싸여, 후리후리하고 날씬한
여인이 지나갔다, 화사한 한쪽 손으로
꽃무늬 주름장식 치맛자락을 살포시 들어 흔들며,
날렵하고 의젓하게, 조각 같은 그 다리로.
나는 마셨다, 얼빠진 사람처럼 경련하며,
태풍이 싹트는 창백한 하늘, 그녀의 눈에서,
얼을 빼는 감미로움과 애를 태우는 쾌락을.
한 줄기 번갯불..... 그리고는 어둠! - 그 눈길로 홀연
나를 되살렸던, 종적 없는 미인이여,
영원에서밖에 나는 그대를 다시 보지 못하련가?
저 세상에서, 아득히 먼! 너무 늦게! 아마도 영영!
그대 사라진 곳 내 모르고, 내 가는 곳 그대 알지 못하기에,
오 내가 사랑했었을 그대, 오 그것을 알고 있던 그대여!
[지나가는 어느 여인에게 -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