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파꽈리 Nov 04. 2023

맥락 없는 이야기

어제, 정말로 오랜만에 과거에 좋아했었던 여러 시들을 다시 읽어 보았다. 운 좋게도 천여 편에 가까운 시들이 올라있는 블로그 하나를 찾게 되었고, 또 한 번 더 운이 따랐는지 그곳에는 내가 선호했던 시인들과 그들이 썼던 시들이 참 많았기에 순식간에 마음이 풍족해졌다. 그러다 마주하게 된 이문재의 <농담>. 그래 이 시도 있었지. 한 행 한 행 읽다가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났다. 시가 우스워서가 아니라 내가 우스워서. "그윽한 풍경이나 /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검은색 캡을 깊게 눌러쓴 채 국밥을 응시하며, 아무 생각 없이 연신 숟가락질만 해대는 내 모습이 그려졌다. 나는 정말 강하구나. 아니, 나는 진짜 외롭구나. 강하거나 외롭거나 어느 쪽에 속한다 해도 어떤 의심이나 불만이 없는 사람. 아니, 없는 게 아니라 남은 게 체념뿐인 사람. 그래서 내가 나도 모르게 웃었구나. 오늘 새벽 찾았던 국밥집엔 여전히 사람들이 많았다. 간혹, 1인석에 자리한 사람들을 힐끔거리며 물어보고 싶었다. 당신은 혹시 어느 쪽인가요.


엊그제 아침, 업무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이가 사내 메신저로 질문을 해왔다. "혹시 어제가 생일이셨어요?" 사회생활 하면서 만나게 된 직장 동료에겐 나이차를 불문하고 존대를 하고 있다. 상대가 먼저 말을 편하게 하라고 신호를 주지 않는 한, 내 쪽에서 먼저 말을 낮춰도 되냐는 의향을 내비치는 일은 없다. 내가 이 아이에게 말을 편하게 하는 건 바로 그 신호가 있었기 때문인데, 마음씀씀이가 예쁜 그 아이의 성정을 조금은 더 자연스럽게 대할 수 있게 되어 나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아니!"라는 단답을 하고는 11월인데도 아직 이렇게 덥다는 말로 화제를 돌렸다. "맞아요!" 맞장구치는가 싶던 아이는 이내 그러면 생일이 언제냐며 내가 돌렸던 화제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능청스럽게 한 번 더 화제를 바꾸려는 시도를 해봤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졌다. 순순히 날짜를 알려주고 나서는, 언제부턴가 감흥이 없는 생일보다는 올해 남은 1.5일의 연가를 언제 쓸까 그게 더 관심사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생일인데 재미있게 지내야 한다는 말과 함께 연가는 12월에 쓰라는 해답을 던져놓고 아이는 사라졌다. 홀연히! 


저번 주, 퇴근하는 길에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듣는데 손흥민 얘기가 나왔다. EPL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는 그의 몸값이 하루 사이에 무려 5백만 파운드, 원화로 약 83억 원이 올랐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운동선수의 가치를 매길 땐 나이의 영향 또한 무시할 수가 없는데, 31살이었던 그가 6월 28일부로 30살이 되면서 바로 그 한 살 차이가 만들어 내는 값어치가 이렇게 엄청난 것이라고 말을 잇고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1살이 되는 우리나라식 나이 매기는 법이 사라지고 이제는 만 나이로 통일하는 법이 시행되는 게 그날이었나 보다. 비록 1살 차이라고는 하지만, 그것도 인위적인 조치를 통한 회귀라고는 하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건 뭔가 불가항력적인 자연의 이치를 깨뜨리는 것 같은 희열을 낳는다. 그러고 보면 시간의 역행을 소재로 한 드라마나 영화들도 많았다. 부록으로 어떤 해파리도.


언젠가 보았던 흥미로운 기사 하나는, 일반적으로 번식을 한 후 생을 마감하는 여타의 해파리들과는 달리 4.5밀리미터 정도 되는 크기의 Turritopsis Nutricula는 번식을 한 후 독특한 세포 변형을 통해 미성숙의 폴립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는 특질을 지니고 있다는 내용을 소개해놓고 있었다. 죽을 때쯤 되면 이 같은 특이한 자생력으로 다시 젊음을 회복할 수 있으며 게다가 이런 사이클이 영원히 지속될 수 있다고도 하니, 비록 일개 해파리에 지나지 않을지언정 경이로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당시 이 자료를 접했을 때 언뜻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가 떠오르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이전 세상을 되돌아보거나 다음 세상을 기약하는 생사의 반복 속에서 해탈에 이르려는 통상적인 불교의 세계관과는 아무 관련이 없지만, 어쨌거나 기적적인 회춘 시스템에 입각하여 죽음이 배제된 삶이 현세에서 무한히 반복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그쪽으로 살짝 신경이 쏠렸던 것. 결국 이 특이한 해파리의 생태는 삶과 죽음이 반복되고 급기야 종이 교차하기도 한다는 윤회와는 명백한 차이를 보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비록 한 세상에서일 뿐이지만 생애주기를 끝없이 반복한다는 점에 있어서만큼은 일견 비슷한 맥락으로 바라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라는 영화가 있다.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 13개 부문에 이름을 올렸던, 1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날 노인의 몸으로 태어난 한 아이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젊어진다는 것을 기본 콘셉트로 하고 있는 영화. 사실 이 같은 설정만을 놓고 보면 전개되는 이야기에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을 수 없겠으나 개인적으로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영화는 다소 실망스러웠었다. 그나저나 생애주기를 끝없이 반복할 수 있다는 그 해파리(Turritopsis Nutricula)와 이 영화는 어떤 연결고리가 있을까. 영화 속에서 특히나 나는 마지막 컷이 참 인상적이었다. 포대기에 둘러싸인 갓난아이 모습의 벤자민이 주름 가득한 얼굴의 데이지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마침내 찬찬히 눈을 감던 장면. 금방이라도 다시 눈을 떠 총총하게 연인을 바라볼 것만 같은 갓난아이의 모습이 내게는 도무지 죽음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었다. 그렇게 다시 눈을 뜬 벤자민은 나이를 먹으며 늙어가고 데이지는 시간을 먹으며 젊어지면서 또 다른 한 편의 사랑이야기가 시작될 것만 같았다. 끝나지 않은 삶, 끝나지 않은 사랑. 이런 이미지 속에서 무한히 생을 반복하는 Turritopsis Nutricula를 떠올리는 건 엉뚱한 것인지, 아니면 자연스러운 것인지.


오늘, 국밥을 다 먹고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도 여전히 날은 어둑어둑했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걷어내던 도로 위 어둠. 그렇게 종적을 감추는 어둠을 따라 나 또한 어딘가로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거쳐 왔던, 돌이킬 수 없는, 그러나 돌아가고 싶은 날들. 어떤 날은 친구들과 함께 72-1번 좌석버스를 타고 학교 근처 자취방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여름방학 기간, 타 대학에서 있었던 영어 회화 프로그램 마지막 수업을 들었던 날이었다. 몇 주 동안 같은 반에서 함께 수업을 들었던 한 여학생은 양 갈래로 땋은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때 처음으로 braids라는 영어 단어를 알게 되었다. 그 학생은 주로 강의실 앞에 나는 뒤에 앉았었는데, 강의 도중에 간간이 서로 눈이 마주쳐 괜스레 마음이 설레곤 했었다. 프로그램이 끝나갈 무렵, 하루 날을 잡고는 주변 가까이 앉아 강의를 들었던 사람들 십여 명 정도 모여 저녁을 먹고 술도 마시고 노래방도 가며 뒤풀이를 했는데, 그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나중에 그 학생의 귀에도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 일이 있고 며칠 후, 나와는 떨어져 앉은 자리였으나 규모가 크지 않았던 강의실이라 옆자리 짝꿍에게 말하는 그 학생의 목소리를 어렴풋하게나마 들을 수 있었다. "우리 오늘 뒤풀이할 때 노래방도 가자. 난 노래 잘하는 사람이 좋더라." 그 말을 끝내자마자 고개 돌려 나를 바라봤던 그 학생. 아까부터 내가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알았던 걸까. 마지막 수업이 있었던 날, 그렇게 72-1번 좌석버스를 타고 자취방으로 돌아가던 날,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창 밖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는 그 학생을 보았다. 플루트가 담긴 가방을 메고 혼자서 거리를 걷고 있는 그녀를 보았다. 그때 나는 친구 녀석들에게 먼저 가라 양해를 구했어야 했는데, 그리고 차에서 내렸어야 했는데, 그 쉬운 말을 내뱉지 못하고 망설이고 주저하며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체념이란 게 별게 아니다. 언젠가 태어났던 누군가가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고 뱃속을 챙기면서 살아가는 것. 그러다 때때로, 돌아갈 수 없는 날들을 붙들고는 맥락 없는 이야기를 그리며 시간을 죽이곤 하는, 그런 것.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꿈꾸던 언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