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좋아하는 시가 하나 있다. 오래되었다. 손에 관한 시인데 심지어 사랑하는 손이다. 쓸쓸함이 깃든 비를 내리나 안식을 건네는 손이다. 가여움이 오히려 더 따뜻한 평화를 느끼게 하는 그 손을 나도 모르게 사랑하게 됐지만, 정작 왜 사랑하는지는 아직도 알지 못하겠다. 그렇듯 이유를 몰라 답답함에도 그래서 더 마음이 가는 시가 하나 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옆집에 내 또래 여자아이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의 해 질 녘, 학교에서 개최하는 웅변대회를 준비하면서 옥상에서 목소리 높여 뭔가를 주장한다 외쳤을 때, 지근거리 평지에서 박수를 치며 나를 응원해 줬던 아이. 하루는 등굣길에 동행을 하게 됐는데, 내 의사는 묻지도 않은 채 덥석 손을 잡더니 웃는 낯으로 이러고 학교까지 가자는 제안을 해왔다. 싫지 않았다. 그런데 좋지도 않았다. 손을 잡고 가자니, 그것도 학교까지라니. 당시에 나는 좋아하는 아이가 따로 있었다. 행여나 학교 근처에서 그 아이가 나를 보면 어떡하지. 그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해 학교에 가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찜찜했다. 그러면서도 그때 나는 그 아이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웃기게도 그 시절 내가 좋아하고 있던 아이의 손을 잡아볼 용기 또한 없었다.
해마다 6·25가 되면 학교에서는 그림 그리기 대회를 열었다. 상기하자 육이오, 잊지 말자 육이오. 반공의 기치를 올리며 막무가내로 어린 학생들을 독려했다. 육이오가 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었지만, 머리에서 짜낼 수 있는 온갖 아이디어를 동원하여 혼신을 다해 그림을 그렸다. 그때 나는 한반도 지도를 그려놓고 38선으로 허리를 갈라 위는 빨간색 아래는 파란색을 진하게 칠했던 기억이 난다. 아니 그렇게 색칠하기에 앞서, 지도에다가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손을 큼지막하게 그려 넣고는 손가락마다 괴물을 연상시키는 듯한 기괴한 손톱을 기다랗게 덧붙여 놓았다. 그리고는 손등 위를 칼로 찍어 여기저기 새빨간 핏물이 튀도록 만들었다. 남침하는 괴뢰를 단죄하는 정의의 사도가 된 심정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때 내가 무슨 상을 받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무튼 상을 받기는 받았다. 그저 상을 받았다는 것만으로 세상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그런 나이였다.
영화 <접속>이 한창 인기였던 시절, 하이텔 나우누리 천리안 등등이 제공했던 대화 프로그램은 출근길 미어터지는 지하철 2호선을 연상시킬 만큼 연일 사람들의 북적거림으로 상종가를 치고 있었다. 개중 한 통신회사의 프랑스어 동호회에서 만났던 그 아이는 프랑스어로 "꿈"을 의미하는 아이디를 쓰고 있었다. 꿈, 꿈이라니. 내가 너를 꿈꿔도 될까, 하는 유치한 생각을 마구마구 샘솟게 하던 아이였다. 내가 먼저가 아니고 걔가 먼저 다가왔던 인연이었기 때문인지 설렘의 깊이 또한 끝 간 데 없이 아득하게 느껴졌었다. 그렇게 만나기를 몇 개월. '오늘은 이제 손을 한번 잡아봐야지!' 큰 마음을 먹은 날이 있었다. 미친놈이었다. 그렇게 연애를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몇 개월 만에야 비로소 손을 잡을 생각을 했다니. 드디어 마음 다지며 실행에 옮겨보고 싶어 했다니. 불쌍한 놈이었다. 아끼고 또 아끼려다가 손도 못 잡아보고 끝난 연애 잔혹사였다.
그렇게 나의 연애는 손으로부터 출발할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여자와 손을 한 번 잡기까지 상당한 과정과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손으로 표현되는 사랑은 유독 가슴에 와닿았다. 닿을 듯 닿지 않는 거리, 쉬이 허물어뜨릴 수 없는 거리. 그래서 끝내 허공에 머물고 마는 저 흐릿한 손이 내가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섣불리 말할 수 없는 이야기로 축축 세상을 적시는 손. 너의 손을 잡으면 그 비도 멈출까. 사람도 사랑도 구식이어서 손이 아니고서는 나를 설명할 길이 없다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손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연애를 할 수 없을 것 같아, 나도 몰래 내가 나를 규정하고 보이지 않는 틀 속에 스스로 갇혀 살던 시절이 있었다.
거기서 알 수 없는 비가 내리지
내려서 적셔 주는 가여운 안식
사랑한다고 너의 손을 잡을 때
열 손가락에 걸리는 존재의 쓸쓸함
거기서 알 수 없는 비가 내리지
내려서 적셔 주는 가여운 평화
[사랑하는 손 : 최승자]
"사랑한다고 너의 손을 잡을 때 / 열 손가락에 걸리는 존재의 쓸쓸함" 나는 그렇게 '너'의 손을 잡아본 기억이 없다. 손가락 마디마디 절절하도록, 맞잡은 두 손에 감히 그 무엇도 끼어들 수 없도록 손바닥을 밀착시켜 '너'를 만져본 적이 없다. 그래서 열 손가락에 걸리는 쓸쓸이, 그것이 전하는 안식과 평화가 얼마나 가여운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짐작하기 어려운 그 가여움이 오히려 더 마음을 데우는 이유 또한 찾지 못하겠다. 내가 살아온 내 인생인데, 내가 안타까워 차마 고백하기 부끄러운 '너'의 손. 편치 않았지만 끝끝내 놓지 못했던 손, 아무것도 모른 채 진한 핏물만 콸콸 쏟아내게 했던 손, 마침내 잡고자 했으나 너무 늦어 거절당했던 손. 그래서 내 손으로,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손으로, 상상으로도 가늠하기 어렵게 빚어진 어느 날의 사랑에서 비가 내린다. 거기서 알 수 없는 비가 내린다. 내려서 적셔 주는, 가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