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수는 오늘>이라는 코너가 있다. <배철수의 음악캠프> 얘기다. 그는 1990년 3월 19일부터 지금까지 1인 DJ 체제를 유지하며 33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해당 방송을 이어오고 있다. 언제부터 내가 이 방송을 듣기 시작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모르긴 몰라도 족히 스무 해는 넘는 세월 동안 그와 함께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청취자의 입장으로서 그 기간에 개근을 했을 리는 만무하지만, 이 프로그램을 대하는 애정의 깊이로 따지자면야 그의 방송을 듣는 전체 청취자들 중 최소한 평균 이상은 되지 않을까 싶다. 뭔가 좀 낮게 잡은 것 같기도 하고. 너무 겸손을 떨면 오히려 꼴 보기 싫은 경우도 있다던데, 내가 생각하는 배철수는 그저 시큰둥하게 한번 웃으며 "뭐 그런 걸 다 따지고 그러나요. 음악을 좋아하면 그걸로 된 거지."라는 시원한 멘트를 날릴 것 같은 느낌이다.
뭐니 뭐니 해도 이 방송의 트레이드마크는 "광고 듣겠습니다."라고 생각한다. 언급하는 것조차 이제는 진부한 느낌이 들지만, 어쨌든 나처럼 오랫동안 음악캠프를 들어왔다면 여기에 이의를 달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광고가 나가기 전 "잠깐만요.", "조금 있다 다시 올게요.", "잠시 후에 뵐게요." 등등이 그 시절 여타 DJ들의 단골 멘트였는데, 꾀죄죄한 몰골에 콧수염까지 기른 어떤 남정네가 좌고우면 하지 않고 광고 듣자고 직진하는 모습에 상큼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 언제부턴가 다른 프로그램 DJ들도 비슷한 멘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광고 듣고 올게요." 요리 보고 저리 봐도 광고를 듣는 건 사실인데, 방송에서 DJ가 광고 얘기를 꺼내는 게 무슨 이유에선지 불편했던 시절이 있었나 보다. 그래서 그 알쏭달쏭한 벽을 깨트린 배철수가 더 마음에 들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광고 듣자는 멘트와 더불어 또 하나 얘기하고 싶은 게 <철수는 오늘>이라는 코너다. 퇴근 후 차를 타고 가다 보면 6시 30분 무렵에 흘러나온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일기 형식을 빌려 배철수의 음성을 통해 최근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소재부터 시작해서 뭔가 생각할 만한 거리들을 다양하게 제공해 주는 터라 부담 없이 가볍게 들을 수 있다. 물론 이 '부담 없이 가볍게'라는 표현은 애써 집중하지 않아도 그 내용이 자연스레 귀에 쏙쏙 박히는 차원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 결코 내용 자체의 완성도나 질적인 측면의 경중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하루치 업무를 끝내고 퇴근길을 달리고 있을 때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철수는 오늘>. 세상엔 수많은 분야의 재능이 있을 텐데, 방송작가로서의 재능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언젠가 라디오 PD를 꿈꿨던 적이 있었기 때문일까. 가끔은 나도 배철수처럼 라디오 방송을 통해 내가 쓰는 <나는 오늘>을 읊어보고 싶은 순간이 있다. 쉬이 부를 수 없었던 너를 소환하고 싶은 적이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잘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평소와 다르게 정신이 말똥말똥하다면 과연 이 상황을 어떻게 넘겨야 할까 생각해 본다. 딱히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의 여지도 별로 없는 깊고 깊은 밤. 이리저리 뒤척이면서 오지 않는 잠을 계속 청한다든가, 귀찮긴 하지만 우유 한 잔을 데워서 마셔본다든가, 가볍게 옷을 걸치고 잠시 주변을 산책한다든가, 그도 아니면 적당한 볼륨으로 라디오를 켜놓고 잠이 올 때까지 얼마간 시간을 보낸다든가, 하는 일을 할 수 있으려나. 이럴 때면 나는 주로 라디오를 틀어놓고 잠을 청하는 편인데, 오래전 어느 방송 프로그램에서 <너를 기억하는 이름>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코너와의 첫 만남도 꼭 이런 식이었다.
너를 기억하는 이름. 처음 이 문구를 접했을 때 참 의아했다. 그것은 '너'라는 단어와 '이름'이라는 단어를 은연중 하나의 대상으로 일치시키려는 것에서 오는 인식의 오류 같은 것이었는데,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너를 기억하는 이름'은 누가 보더라도 명백한 비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루하루 청취자들의 사연을 듣다 보니 그저 어색하기만 했던 이 문구의 의미를 자연스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추억을 쌓으면, 그 속에는 그들이 일상에서 공유했던 여러 가지 대상들이 특별한 의미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일례로, 어떤 남녀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는 상태에서 어느 날 우연히 상대방의 휴대폰 벨소리가 바로 자신의 것과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이제 그 노래는 적어도 그들 당사자에게는 일상의 흔한 유행가에 그치는 보통명사가 아닌 일종의 특별한 고유명사가 되어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시간이 흐른 먼 훗날, 그들이 결혼으로 맺어졌건 아니면 헤어져 남남이 되었건 간에 그때 그 노래는 각자의 기억 속에서 때때로 상대방을 호출하는 매개체로 남을 수밖에 없는데, 이 경우 바로 그 노래가 '너'를 기억하는/떠올리는 '이름'이 되는 것이다. 굳이 이름이라는 것에 초점을 둔다면 해당 노래의 제목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어쨌거나 각각이 뜻하는 바가 서로 다르지는 않다.
라디오에서 나오던 사연들은 대부분 헤어진 연인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때 그거 기억나니?"라는 말로 누군가와 함께했던 자신의 과거를 들춰보는 사람들. 물론 사연을 적어 보낸 그들 모두가 여전히 사랑이라는 아련한 감정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워할 게 없어서 기억을 그리워할 때가 있는 것처럼, 누구에게나 잠시 현실을 잊고 언젠가의 추억에 심신을 의탁하고픈 때가 있는 것이니까. 과거의 어느 시간대에 머물고 있는 너를 기억하는 이름 하나쯤 떠올려 이 계절을 노래해 보고 싶은 마음이 누구에겐들 없을까. 하지만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지금까지 언급한 것과는 살짝 다른 관점의 이야기를 한번 해보려고 한다.
앞서 나는 너라는 단어와 이름이라는 단어를 하나의 대상으로 일치시키려는 경향이 있다고 했는데, 굳이 이유를 들자면 상대방을 가리킬 때 너라고 하기보다는 주로 이름을 부르는 나의 개인적 성향을 그 짧은 문구 속에 담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보거나 듣게 되면 자연스레 그 사람의 얼굴부터 시작해서 성격이나 인품, 그리고 그 사람과 공유했던 일 등등을 떠올리게 된다. 얼굴을 찌푸리기도 하고, 웃음을 짓기도 하고, 무덤덤해하기도 하고, 또 마음 아파하기도 하고. 그렇게 이름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많은 감정들을 실어다 준다. 너라는 말. 사람들마다 각기 다른 경험이 존재하므로 상대방을 가리킬 때 어느 누군가는 이 말을 선호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말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굳이 마음먹고 부른다면야 못할 것도 없겠지만, 언제부턴가 자주 듣게 된 아저씨라는 호칭에 멋쩍은 표정을 짓게 되는 것과 비슷한 느낌으로 이 말에 대하여 나 스스로 어색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서 너라는 말은 불리는 상대방과 나 사이에 왠지 모를 서먹함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킬 때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나의 이런 해묵은 성향이 <너를 기억하는 이름>이라는 코너를 접하면서 조금은 바뀌게 되었다. 비록 사연 속 그들의 인연은 끝이 났지만, 과거 사랑하던 때처럼 여전히 상대방을 너라는 말로 부를 수 있고, 또 불릴 수도 있다는 것에서 느껴지는 둘 사이의 직통 거리. 아마도 이 부분에서 나는 지금까지 감지하지 못했던 색다른 무언가를 만났던 것 같다. 이름을 부르는 행위 자체에 대한 선호와는 별도로 너라는 말에 대해서 느꼈던 어색함이나 상대방과의 거리감이 많이 지워진 것인데, 바꿔 말하면 전에 없었던 친근함을 느끼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지난날 내가 너라는 말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구박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사뭇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혹 내가 과거에 누군가를 부를 때 이름을 부르는 대신 너라고 불러 보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나 후회 같은 게 일기도 했고. 그래서,
<나는 오늘>, 잠이 오지 않는 밤을 핑계 삼아 너를 떠올려본다. 언젠가 들었던 '너를 기억하는 이름'에서 발견한 친근함을 담아 너를 불러본다. "그때 그거 기억나니?" 능청스럽게 건네볼 수 있는 너는 이제 없지만, 언젠가 만날지 모르는 또 다른 너를 생각하며 천천히 나지막이 발음해 본다. 너, 너, 너, 너, 너. 말줄임표 같기도 하고 메아리 같기도 한 너를 부르는 일이 왠지 이 어둠을 밝히는 등불처럼 생각되는 밤. 급기야 <나는 오늘>, 소박한 꿈 하나를 꿔 보기로 한다. 훗날 누군가와 맛있는 차 한잔을 나눌 때, 혹은 손을 잡고 산책을 할 때 건네는 이야기 속에 양념처럼 살짝 너라는 말을 담아 보기도 할 거라는 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