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명 가까운 인원이 근무하는 공간치고는 주차장이 꽤 협소한 편이다. 게다가 직원들 입장에서는 설상가상으로, 방문 민원인들의 편의를 위한다는 명목하에 자신들을 위해 마련된 주차 공간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보통 자차로 출근을 하는 사람들은 주차할 장소로 근무처 주변 이곳저곳을 살필 수밖에 없는데, 나는 주로 某 대학교 내 주차장을 이용하고 있다. 비교적 이른 시각, 주차할 자리가 꽤 많이 여유로운 상태에서 차를 세워두고 10여 분 정도 걸으면 근무처에 도착한다. 매일매일 어디에 차를 세워야 하나 골머리 앓을 필요도 없고 아침 일찍 가볍게 산책도 할 수 있어서 말 그대로 일석이조인 셈이다.
요즘엔 아침 식사로 편의점 삼각김밥을 자주 먹는다. 현관을 나선 후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편의점에 들러 삼각김밥을 산다. 운전을 하고 주차장에 도착해서 근무처까지 걸어가는 동안 김밥을 먹는다. 이게 보통의 출근 루틴인데, 그저께 아침엔 눈이 엄청나게 많이 와서 차 트렁크에 비상용으로 비치해 둔 5,000원짜리 다이소 비닐우산을 펼쳐 들기도 했다. 비 때문이 아닌 눈 때문에 우산을 썼던 일이 내 삶에 몇 번이나 있었을까. 한 손엔 우산을, 다른 한 손엔 김밥을 들고 먹으며 그렇게 눈 내리는 아침 출근을 하던 참이었다.
2023. 12. 20. 수요일 06:08
평소 길을 걸을 때 시선을 그다지 먼 곳에 두지는 않는 편이다.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 고전문학을 가르치시던 선생님께서 어느 날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난다.
"넌 왜 그렇게 어깨를 꾸부정하게 몸을 웅크리고 걷냐? 세상 짐 혼자 다 짊어진 사람처럼 오만상을 하고 땅을 바라보면서!"
"그냥요!"
..라고 당차게 대답하면 장난으로라도 한 대 맞을 것 같아서 그냥 멋쩍은 웃음으로 침묵했었다. 아무튼 이날 아침도 오래전 그때와 비슷한 모습으로 길을 걷다가 예기치 않게 이 녀석을 만나게 된 것이다. 지근거리를 두고서야 비로소 킥보드가 놓여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인적이 드문 새벽녘, 퍼붓는 눈발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소리 없이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고 있던 녀석. 개인용이 아닌 공용 킥보드 같았는데, 인도 한가운데서 당차게 길막을 하고 있는 녀석을 보고는 살짝 어이가 없었다. "너 왜 여기 있냐?" 물으면 "그냥요!"라고 답을 해올 것 같은 느낌. 한 대 갈기려던 차에 문득 언젠가 마주쳤던 또 다른 킥보드 하나가 떠올랐다.
2023. 9. 28. 목요일 12:37
추석 연휴 첫날이었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한 주말 오후가 되면 집 주변으로 가볍게 산책을 한다. 돌이켜 보니 지금껏 주말에 특별한 일이 거의 없었다. 사람을 가늠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그가 지나온 과거를 들춰보란 말이 있다. 비록 잠깐이었지만, 참 징그러운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올해는 국군의 날까지 낀 추석 연휴가 무려 6일이나 되다 보니 시작부터 살짝 무료하다 싶은 기분이 들어, 이날은 주말도 아닌데, 게다가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산책을 나섰다. 늘 하던 식으로 같은 코스 비슷한 패턴을 밟아나갔다. 아파트 단지를 나서서 근처 도서관을 지나 쭉 걷다 보면 나름 산책의 중간 지점이라고 생각하는 곳에 다다른다. 주변 어느 카페에 들러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사들고 산책의 후반부에 돌입한다. 그런 식으로 거의 마무리를 할 즈음이었다. 피니시 라인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길 한가운데 대자로 엎어져 있는 킥보드 한 대를 마주하게 되었다. 배를 훤히 드러내 보인 채 모로 누워있는 킥보드를 본 내 기분은 이랬다. 꼴좋다!
평소 킥보드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은 편이었다. 탑승 인원 규정을 어긴 채 두어 명이 함께 올라타 거리를 누비는 것, 차선을 바꿔가며 차량 운행을 방해하는 것, 인도를 질주하며 행인들을 위협하는 것 등등 킥보드로 자행되는 대부분의 것들이 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투성이였다. 물론, 보는 사람 불안하지 않게 곁에 있는 사람 짜증나지 않게 킥보드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많으리라 생각하지만, 적어도 내게 있어 킥보드는 미꾸라지 몇 마리가 연못 물 전체를 흐리게 하는 것처럼 부분이 전체를 매도하는 바로 그 모습으로 각인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렇다면 이날, 혹시 킥보드에 관해 나와 비슷한 마음을 품고 있었던 누군가가 나보다 먼저 이 길을 지나갔던 게 아닐까. 웬만한 세기의 바람을 맞지 않고서는 저렇게 엎어져 있을 킥보드의 무게가 아니었다. 미약한 바람의 기운마저 느끼기 힘들었을 만큼 이날 오후는 아주 평온했다. 그래서 내 생각은 이랬다. 길 한가운데서 세로로 길막을 하고 있던 킥보드가 짜증나 누군가 한 방! 대차게 갈겼구나.
그러나 속이 시원했던 것도 잠깐. 그 상태 그대로 킥보드를 지나쳐 몇 걸음을 내딛다가 이내 멈춰 서고 말았다. 뭔가 계속 불편한 마음이 들어 그 자리를 그냥은 떠날 수가 없었다. "넘어졌어요. HELP!" 대체 누가 이런 문구를 새겨놓을 생각을 했을까. 나는 그다지 선량한 양심을 지닌 인간이 아니다. 초·중학교 도덕책에서 볼 수 있을 만한 바른생활 아저씨는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이런 내가, 킥보드에 관해 평소 가지고 있던 인상에 따라 쌤통이라 일갈하며 지나쳐야만 하는 상황에서 주저하며 망설이고 있었다.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고작 저 문구 하나 때문에. 인간의 심리에 어떤 면이 있기에, 그래서 저 문구가 내 마음 어떤 부분을 자극했기에 나는 이렇게 고민을 하고 있는 걸까. 지금도 여전히 그에 대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2023. 9. 28. 목요일 12:38
생각보다 훨씬 더 묵직했던 킥보드를 일으켜 길 가장자리에 세워놓은 후에야 불편했던 마음이 사라졌다. 비로소 홀가분하게 녀석을 두고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확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오랜 고민 끝에 나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내가 녀석을 일으켜 세운 건 아마 이런 마음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을까. 내가 킥보드를 바라보는 것처럼, 나도 누군가의 눈엔 이런 킥보드가 될 때가 있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심지어 약간의 반감마저 일으키는 대상이지만, 내가 지금 녀석을 돕는 일처럼, 아니,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저 도울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것처럼, 과거의 누군가 또한 스스로도 어쩔 수 없이 그런 내게 도움을 주었을지 모르고, 또 앞으로도 그런 일을 하게 될지 모른다. 너나 나나 우리 모두 내키지는 않지만, 바로 그 내키지 않은 일을 하지 않으면 도무지 마음이 찜찜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란 게 있는 거라고. 이런 걸 이타심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도운 건 결국 내 마음 편하자고 한 일이기 때문. 남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그저 나를 위한 행위였기 때문. 뭐가 뭔지 두루뭉술하기만 했던 그날, 왠지 나는 그날을 기억하고 싶었다. 그래서 녀석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찰칵!
2023. 12. 20. 수요일 06:09
잠시 그렇게 지난날을 회상하고서는, 출근길을 가로막고 있던 킥보드를 한 대 치려던 생각을 거두고 그대로 녀석을 지나쳐 계속 걸음을 옮겼다. 눈이 정말로 많이 내리는 아침이었다.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 이 시가 떠올랐던 건 "퍼붓다"라는, 그리고 "눈"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퍼붓는 눈에도 굴하지 않고 당차게 길막을 하고 있던 킥보드 때문이었다. 그렇게 옹골차게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트리를 한번 장만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다니, 여태껏 꿈도 꾸지 않았던 일이었다. 그냥 내가 나를 따뜻하게 해주고 싶었다. 조그마한 트리, 조명, 그리고 몇 가지 장식물들을 사서 어딜 보아도 휑한 내 방을 은은하게 밝히고 싶었다. 그 빛을 받아 나도 잠깐 빛나고 싶었다.
I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II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즐거운 편지 : 황동규]
2023. 12. 20. 수요일 18:10
퇴근을 하던 중이었다. 아침에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가다가 녀석을 다시 마주쳤다. 깜짝 놀랐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이런 기다림도 있구나 싶었다. 아침에 마주친 후로 장장 12시간 가까이 지났음에도 녀석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우두커니. 미동도 없이.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 속 화자는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했다.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한다 했다. 시 속의 골짜기가 아닌 이곳의 눈은 진작에 그쳤거늘, 얘는 도대체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퍼붓는 눈발 속에서도 당당한 위용을 자랑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짐작도 할 수 없는 그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처량한 녀석의 모습만 남아있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황지우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 떠올랐다.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했던 그 시가 떠올랐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나는 이 킥보드에서 '너'에게 갈 수 없는 운명을 본 것 같았다. 그래서 제발 '너'에게 가지 마라 부탁하고 싶었다. 그냥 지금 모습 그대로, '너'를 찾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접으라 말해주고 싶었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언제나 사랑은 기다리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다. 기다리는 동안 너에게 갈 수도 있고, 기다리는 동안 마음을 접을 수도 있는 것이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셋째 기훈(송새벽)은 과거 감독으로서 첫 작품을 찍던 도중에 본인의 자질이 부족함을 절실히 깨닫지만, 행여 그 사실이 세상에 드러날까 두려워 애꿎은 배우 유라(권나라)를 타깃 삼아 희생양을 만든다. 연기 못하는 너 때문에 내 영화가 망했어. 그러나 참으로 드라마틱하게도 이 두 사람은 나중에 다시 만나 사랑을 하게 되고, 그때와 달리 분위기가 역전되어 다음과 같은 모습까지 보여주는 단계에 이른다. 유라에게 보낸 카톡에 왜 답장이 빨리 오지 않을까, 숫자 1은 도대체 언제 없어질까, 조바심에 마음을 끓이던 기훈. 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동생을 놀리는 재미에 빠지는 첫째 상훈. 한참이 지난 후에야 도착한 답장은 지극했던 그의 기다림에 비해 그 내용이 턱없이 부실하지만, 기훈은 답변이 왔다는 사실 하나로 그저 좋아 죽을 따름이다. 둘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진행이 될지를 보여주는, 드라마 속에 깔려있던 여러 복선들 중 하나였다.
굳이 덧붙여 말할 필요가 있나 싶지만, 기다리는 자 스스로 자각하며 돌아서는 일이 너무 힘들다는 전제라면 그래도 이렇게 몇 줄 더 첨가하는 건 괜찮지 않을까. 사랑이든 사랑이 아니든, 기다림이란 적어도 뭔가 특별한 관계에서 비롯된다. 그 특별함에 관해 당사자 모두가 동의를 하든 아니면 당사자 일방만이 동의를 하든 간에 여지없이 시작되는 기다림. 드라마처럼 숫자 1이 언제 없어질까로 시작되는 기다림이라면, 그 결괏값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만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자신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는 방식을 찾아낼 수 있다면, 쓸데없는 고통을 겪거나 부질없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다면 이것 또한 나름대로 행복한 일이 아닐까. 숫자 1을 지우는 건 너무너무 쉬운 일이란 걸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다만, 그 1을 지우지 않고 오래도록 남겨두는 진짜 이유를 아는 건, 그 1을 넘겨받은 당사자 본인뿐이다. 그러나 우습게도 우리 모두는 바로 그 당사자 본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당사자 입장이 되어 오래도록 1을 지우지 않고 놔두는 자신의 생각을 짚어 보면 자연스레 그 이유가 도출이 된다. 그렇듯, 누군가에게 1을 보낸 사람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는 그 이유를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이다. 이날, 퇴근길 킥보드는, 기다림이 묻어나는 모습으로, '너'에게 가도 되는 모습이 아닌 숫자 1이 지워지길 바라는 모습으로, 어느 누구나 그 끝을 짐작할 수 있는 안타까움으로 나를 맞이했다.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닐 거야. 너를 존중하지 않아서도 아닐 거야. 그런 생각으로 이제는 그냥 숫자 1이 지워지길 기다리는 마음은 접는 게 좋아. 그게 네가 사는 길이야. 이게 내가 내놓는 네 기다림에 대한 무조건적인 결괏값이야.
<Sad movies>. 얼마 전 퇴근을 하던 중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흘러나왔던 노래다. 웬일인지 이날따라 DJ 배철수는 개략적으로나마 이 노래에 담긴 이야기를 풀어주는 친절함을 선보였다. "영화 보러 갔는데요. 일이 있다던 남자친구가 내 절친과 같이 영화관에 들어오더라고요. 그들은 날 보지 못했는데, 내 앞자리에 앉더니만 키스까지 하는 거예요. 눈물이 났어요.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왔지요. 내 눈물을 본 엄마가 무슨 일이냐고 물으셨어요. 난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슬픈 영화는 날 울게 만든다고 했답니다." 결국 영화가 슬픈 게 아니라, 영화를 보러 간 그때 그 상황이 슬픈 것이었다며 혀를 끌끌 차던 DJ 배철수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지난 추석 연휴 때 킥보드도, 이틀 전 아침 눈보라 속 킥보드도 비교적 괜찮은 이미지였거늘, 퇴근길에 만났던 킥보드가 이 모든 걸 집어삼키고는 온갖 핑곗거리를 들먹이며 슬픔을 포장하려 하고 있는 것 같다. 써놓고 다시 읽어 보니 그렇게 읽힌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Sad movies>. 영화가 슬픈 게 아니라 슬픔을 포장하려 영화를 들먹였듯이, 킥보드가 슬픈 게 아니라 슬픔을 감추려 애꿎은 킥보드를 들먹인 것뿐이니까.
https://youtu.be/SmepQq5P9-k?si=cbYnqqeYYg4oFj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