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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파꽈리 Jan 15. 2024

노래로 만난 사람

케이블 TV가 드라마 영역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보이기 시작한 게 아마도 이 프로그램부터가 아닌가 싶다. <응답하라 1997>. 요즘도 채널을 돌리다 보면 재방송으로 심심찮게 만나볼 수 있다. 처음 방송을 했던 당시 주변 사람들이 보였던 반응이나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들에 올라왔던 감상 게시글들을 봤을 때 인기가 상당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사실 나는 회차별로 연이어 제대로 챙겨 본 적 없이 띄엄띄엄 시청을 했던 터라 줄거리가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그 재미라는 게 어느 정도였는지 잘 알지는 못한다. 다만 드라마 속 주인공들과 비슷한 시간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진한 공감을 불러일으켰으며, 더불어 각각의 에피소드에 삽입됐던 여러 배경음악들의 효과가 참으로 인상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인기에 힘입어 1994에 1998까지 이어진 응답하라 시리즈. 연도는 조금씩 달랐으나, 세 드라마 모두 주인공들의 남편과 아내가 누가 될까 하는 것과 어떤 배경음악들이 흘러나올까 하는 것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몰고 다녔던 공통점이 있다. 지난 응답하라 시리즈는 많은 이들의 공감을 살 만한 음악들을 차례차례 선사했지만, 이 세상 사람들이 각양각색인 것처럼 드라마에서 흘러나왔던 음악들 또한 각기 다른 모습으로 동시대의 시청자들을 찾아갔을 것이다. 같으면서도 다른, 그래서 자기 자신 외 누군가에게 100% 똑같은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는 없는 노래들. 아무튼 누구에게나 그렇듯, 태어나 지금껏 걸어온 세월의 길목 어딘가에서 응답하라 외쳐볼 만한 노래가 나에게도 있다.


보슬보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했던 저 먼 언젠가의 봄날, 자하연을 오른쪽으로 끼고 다음 강의실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던 내게 어디선가 노란 우산 하나가 쓰윽 다가왔었다. 그때 잠시 나눴던 말들은 시간에 휩쓸려 사라져 버린 지 오래. 바로 이 지점이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그 아이에 대한 최초의 기억이다. 긴 생머리에 종종 애교 있는 사투리를 쓰곤 했던 진주 아가씨. 강촌으로 과 MT를 떠나 저녁을 먹으면서 잘 익은 고기 한 점을 내 입안에 넣어주기도 했고, 학교 축제의 마지막 날 가졌던 과밤 행사 땐 이정석과 조갑경이 불렀던 듀엣곡 <사랑의 대화>를 같이 부르기도 했었다. 그리고 이것 외에 또 무슨 일들이 있었을까.


그러나 그다음 추억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이렇듯 몇 가지 단편적인 기억들로만 그 아이가 재생되는 건 세월이 많이 흐른 탓도 있겠지만, 흔히 우리가 덧없는 것이라 말하는 인간관계의 일반적 속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분명 내가 경험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기록하지 않으면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일들. 그렇듯 기억나지 않는 일이 아예 기억조차 없는 일이 되어갈 때, 너와 나 우리는 서로에게서 한 뼘 또 한 뼘 멀어지고 잊혀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다고 해서, 기억나지 않는다고 해서 아예 추억마저 없는 건 아닐 터. 때로 노래는 온전한 기억을 불러와 추억을 재현시킨다.


과 사람들 몇 명과 어울려 노래방을 찾았던 어느 날, 갑자기 그 아이가 내게 특정 노래 한 곡을 불러달라고 했다. 내 딴에는 그냥 재미로 한번 신청했겠거니 생각했는데 노래를 부르던 도중에 그게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그 아이, 언제부턴가 울고 있었다. 평소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과 자리를 함께했기 때문인지 당시의 심란했던 마음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겉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노래를 마칠 무렵 서둘러 눈물을 훔치던 아이. 일반적으로 사랑에 기반한 청춘사업이라 하면 거기에 뛰어든 대다수의 사람들이 한두 번쯤 부도를 맞는 게 당연지사라지만, 막상 그토록 바랐던 청춘의 꽃을 피우지 못한 채 돌아서야 하는 당사자의 마음이야 실로 형언하기 어려운 것. 그때 우리 일행은 애써 모른 척 웃음을 보였나, 아니면 툭툭 어깨를 두드려 주었나.


얼마 전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들른 어느 사이트에서 오래전 그 아이가 내게 신청했었던 노래를 다시 듣게 되었다. 최용준이 불렀던 원곡이 아닌 성별이 다른 가수의 리메이크 곡이었지만 나름대로 색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었던 <아마도 그건>.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노래를 부른 가수의 이름이 그때 그 아이의 이름과 똑같다는 것. 비록 성은 다르지만 이처럼 이름이 같다 보니, 마치 오래전 우리 일행이 찾았던 그때 그 노래방에서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아이가 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사람은 흘러갔으나 노래는 남았고, 노래를 들으니 다시 또 그 사람을 만나게 된다. 잊고 살았던 그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https://youtu.be/lgWYnbXpWWo?si=QNHSfgPfV-PdOvd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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