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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뭇잎 Aug 21. 2022

그해 여름, 델리


7월, 델리행 비행기를 탔다. 여름의 기운이 느껴지는 6월이 되면 인도에 대한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러다, 녹아내릴 만큼 강렬한 인도의 태양이 그리워지면 표를 끊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된다. 미리 이야기해봤자 걱정과 원망의 말을 듣게 될 게 뻔하다. 출발 직전 공항에서 대구 집으로 전화를 건다. “나, 한 달 동안 핸드폰이 안 될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뉴델리역 맞은편 빠하르간지 거리를 걸으며 처음 그를 보았을 때, 일본인이구나 생각했다. 곱슬곱슬한 머리가 목덜미까지 내려와 있고, 무늬 없는 헐렁하고 큰 티셔츠를 입은 그는 누가 봐도 장기 여행자였다. 델리는 사람과 소, 릭샤와 자동차 등이 마구 엉켜 소음과 먼지로 ‘펑’ 하고 터지기 직전의 풍선 같았다. 날마다 여름 기온이 최고치를 경신하듯 혼잡스러움의 정도는 내가 인내할 수 있는 한계선에 다다랐다. 복잡함과 어수선함 속에서 정신을 차리고 적응하기 위해 델리의 거리를 종일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는지 모른다. 삼원색의 장신구와 옷가지들을 파는 가게, 코를 찌르는 인도 특유의 향이 가득한 향신료 가게, 매대에서 대충 커다란 손으로 한 움큼 설탕을 집어넣은 짜이 가게가 있는 시장통에서 일본인을 만나다니! 같은 동양인을 봤다는 것만으로도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 힘든 사막에서 얼음 생수를 만난 기분이었다. 눈인사 한 번, 고개 까닥 한 번으로 안면을 트게 되었다. 우리는 우연히 같은 숙소에 묵고 있음을,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임을 알게 되었다.

    

인도 배낭여행 초짜인 나와는 달리, 그는 이미 인도에서 1년 이상 봉사활동과 학업을 병행하다 방학이 되어 인도 중부 지역을 여행하고 있던 터였다. 자연스럽게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그는 델리의 관광지, 구석구석의 맛집, 인도 여행의 주의할 점 등을 세심히 알려주었다. 그의 이야기를 인도 유명 배우 얼굴이 그려진 수첩에 빼곡히 적어나갔다. 밥을 먹고 여행지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나누고, 앞으로의 여행 경로와 계획에 대해 상의했다. 인도에 대해 익숙한 누군가가 있으니 긴장이 한껏 풀어져서 꽤 많은 음식을 시켜서 먹고 웃으며 자리를 마무리했다. 그는 우리가 주문한 음식에서 좀 더 추가하여 포장한 음식을 받아 문을 나섰다.     


저녁 해가 넘어가 버려 어둑어둑해진, 델리의 한 골목길. 어지간하면 해가 진 이후에는 돌아다니지 않았던 터라, 마음이 급해져서 숙소로 향한 내 발걸음은 꽤 빨라졌다. 목적지만 향해 눈길을 두고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던 중, 그는 골목길에 있던 몇 명의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포장한 음식을 같이 맛있게 먹으라며 친절하게 몇 등분 갈라 나눠주는 것이었다. 골목길 아이들의 삶이 힘들었음을, 식사는 늘 부족했음을 이미 알고 있었던 그의 행동에는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스스럼없이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건네고는 음식이 아이들에게 적절한지 살폈다. 여행자의 눈으로만 거리를 걷고, 명소를 찾아가고, 가게에서 좋은 가격에 흥정하기 바빴던 나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날 밤 숙소에서 잠을 못 이루었다. 더운 날 에어컨 대신 천장에서 정신없이 돌아가던 팬의 소음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마, 골목에서 툭 떨어졌던 내 마음 때문이었으리라. 저마다의 이유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여러 얼굴을 떠올리니 삶의 무게는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의 습한 공기를 한껏 담고 무겁게 휘청거리던 내 몸을 일으켰다. 인도 북부지역 다람살라로 가는 배낭을 꾸리기 위해.     


더워도 너무 덥다고, 복잡하기도 참 복잡하다며 도시의 혼잡함을 탓했다. 어수선한 여기가 싫어 시원한 북쪽 다람살라로 가는 버스를 예약했다고 했다. 그가 딱지 모양으로 접은 메모지를 한 장 주었다. 종이를 가득 채운 건 직접 그린 다람살라 지도였다. 유명한 티베트식 만둣집, 만둣집 옆 짜이 가게, 짜이 가게 옆 수공예 상점, 상점을 오른쪽 끼고 도보 몇 분 거리의 사원이 조그마한 상자 모양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음식점의 대표 메뉴는 뜨끈한 만둣국이며, 음식점에 파는 수공예품 가격을 사장이 말도 안 되게 후려치려고 할 때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설명과 함께. 현지 구멍가게에서 산 공책 한 장 빼곡히 적어준 그의 메모, 볼펜으로 눌러쓴 다정한 메모 덕분에 인도가 힘들지 않았다. 2002년,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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