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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뭇잎 Sep 15. 2022

제이에게

  그날은 서울역에서 만나기로 했지. 추석을 맞이해 기차를 타고 대구에 같이 가기로 했거든. 명절 귀향 열차표를 인터넷으로 예매하는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에 미리 역 창구에서 사야 했어. 새벽부터 줄 서서 표를 사지 못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표는 무궁화호 입석이었어. 좌석은 구하지 못했지만 괜찮았어. 4시간 서서 가는 게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거든. 입석이라도 구한 게 다행이었고, 너랑 수다 떨며 가다 보면 4시간은 금방 가니까. 다리 아파질 염려는 떠오르지 않았어.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네가 오지 않는 거야. 4시 55분 기차. 플랫폼 3번에 서서 초조하게 손목시계를 바라만 봤지. 전광판에 ‘출발 지연’이라는 안내가 떴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휴대전화가 있었더라면, 어디쯤인지 물어볼 수 있었을 텐데. 결정해야만 했어. 대구 가는 기차에 혼자 올라탈지, 아니면 기다릴지. 급하게 공중전화를 찾아 메시지를 남겼어.  “나 먼저 갈게.” 숫자 ‘8282’도 삐삐 기계에 남았을 거야.    

 

  대학교 들어간 기념으로 산 자주색 이스트팩 가방을 어깨에 메고 대구행 기차에 올랐어. 다시 네가 계단을 뛰어 내려오지 않을지 살폈지. 오지 않은 너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걱정도 되었어. 운 좋게 맨 뒷자리와 출입문 사이, 등을 기댈 수 있는 곳을 찾았어. 배낭을 등에서 배 앞으로 오도록 고쳐매고 자리에 섰어. 네가 없는 4시간은 참 힘들겠다고 생각하면서. 서울역을 떠나는 기차는 영등포, 수원, 천안. 대전. 옥천, 구미, 왜관에 정차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오더라. 혹시나 내릴 역을 지나치면 안 되니 대구 하차 전 역이 무슨 역인지, 도착 시간은 언제인지 다시 한번 챙겨서 들었지. 9시 5분 도착이라며 중얼중얼 되뇌고 있는데, 귀까지 빨개진 네가 숨을 내쉬며 내가 있는 곳으로 걸어오고 있었어. 출발 1분 전에 가까스로 서울역에 도착했나 봐. 타는 곳에 들어서니 떠나기 직전의 안내방송이 나와 큰일났구나 했겠지. 바퀴는 아주 느린 속도로 돌아가고 넌 전력으로 질주했다고. 일단 맨 앞칸에 올라탄 넌 가쁜 숨을 몰아쉬며 1호 차를 지나 2호 차로, 2호 차를 지나 3호 차로…. 나를 찾아왔어. 시간 계산을 잘하고 집에서 출발했어야지, 꾸무럭대면 어떡하냐며 등짝을 한 대 때렸던 것 같아. 그래도 뜀박질 잘한 너 대단하다는 말과 함께.     


  등짝을 맞고도 그냥 웃기만 했던 너는 힘들다는 말을 잘 하지 않았어. 스무 살, 처음 부모님 곁을 떠나 시름시름 향수병을 앓던 나와는 달랐어. 여기저기 학생회관을 돌아다니며 어떤 동아리에 들지 고민하고 있다고 했지. 결국, 너의 선택은 ‘클래식 기타 동아리’였어. 기타 앞에 클래식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어떻게 달라지는지 여전히 모르는 나잖아. 너의 자취방에서 고향 친구들끼리 모였을 때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 클래식 기타 연주를 생전 처음 들었어. 대구에서 올라온 희선이, 선영이, 정우를 환영한다는 의미로 맥주와 안주도 준비했잖아. 이젠 몰래 숨어서 마시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에 들떠 꽤 마셨어. 저마다의 대학 생활에 고충을 토로하면서. 점수에 맞춰서 간 대학이 맘에 들지 않아서 고민, 적성에 맞을 것이라 장담했던 전공이 생각했던 것과 달라서 고민, 맘에 품고 있던 선배가 그저 동생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고민.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큰 소리로 떠들어댔지. “아, 미치겠다. 고등학교 졸업하면 끝인 줄 알았더니 뭐가 이래 복잡하노? 힘들어 죽겠다.” 갑자기 기타 소리가 뚝 하고 멈췄어. 조용히 기타 치며 맥주를 마시던 네가 우리를 향해 소리쳤어.     


“그놈의 죽겠다는 소리 좀 그만해!”

우리는 순간 입을 다물었어. 습관처럼 하던 ‘죽겠네, 미치겠다.’라는 소리가 칼이 되어 네 마음을 조각내고 있었다는 걸 그때야 깨달았어. 우리는 그새 잊었던 모양이야. 너무 큰 사건이었는데. 우린 너무 빨리 기억 속에서 떠나보냈나 봐. 2년 전, 대구 지하철 공사장 폭발사고로 동생을 떠나보낸 너였다는 걸. 아빠와 교통사고로 이별한 지 1년도 안 되어서 말이야. 우리는 상상할 수도 없는 아픔을 연이어 겪고 있었던 너. 너를 위로할 어떤 방법을 몰라 같이 술 마시며 떠들고 웃으면 되는 줄 알았어. 그러면 너도 괜찮아질 거로 생각했어. 넌 웃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나 봐. 그게 아니었는데.     


  우리는 또다시 ‘지하철’이라는 단어는 입에 올리지 않았어. 네가 회사 주재원으로 인도네시아에 간다고 했을 때 속으로 생각했어. ‘혼자 계시는 아주머니는 어쩌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해외로 가면 적적하겠다는 맘이 들었어. 한편으로는, 어디서든 좋은 사람과 함께 즐겁게 지내면 어떨까 생각했지. 거기가 인도네시아든, 한국이든 상관없이.  

    

  다시 추석이 되었어. 나는 이제 기차에서 4시간 서서 가는 건 너무 힘들더라. 설령, 무궁화호 기차로 갈 수 있는 곳이라고 해도 더 빠른 KTX를 선택할 거야. 시간을 버는 게 남는다고 생각하면서. 얼마 전에 무궁화호를 오랜만에 탈 일이 생겼지 뭐야. KTX 역이 없는 곳이었거든. 알록달록 꽃무늬가 그려진 무궁화호를 타니 네 생각이 나더라. 내가 생각한 것과 외관은 딴판이었어. 내부는 20년 전과 다르지 않았지만 말이야. 앞뒤 좌석 사이가 널찍해서 편안하기까지. 탁자는 없었지만, 책이랑 음료수를 무릎에 올려놓기에, 충분한 공간이었어. 벽에 등을 기대고 손뼉 치며 웃던 너와 내가 떠올랐어. ‘아, 내가 그때를 많이 그리워하고 있구나.’ 이번 추석 너는 어떻게 지냈을까? 궁금하다. 산소에도 잘 다녀왔는지, 아주머니 건강은 어떤지. 결국 인생은 혼자라지만, 예전 일을 떠올리며 가끔 안부 주고받는 친구가 곁에 있으면 좋잖아. 그땐 못했지만, 이젠 등 좀 두드려 주고 싶다. 애썼다고. 등짝 스매싱 말고 그냥 토닥토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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